달과 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1)


달과 별


토담집 인우재에서 보내는 밤은 특별하다. 사방이 고요한데,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고 이름 모를 짐승의 소리도 들린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막 부엌에서 나오는 순간, 서쪽 하늘에 걸린 불빛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번진 밤하늘에 누군가 작은 등을 밝힌 듯한데, 초승달과 별이었다. 



가만 서서 달과 별을 바라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큰딸 소리가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둘이서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원주행 버스를 탔을 때는 땅거미가 깔리며 어둠이 내릴 때였다. 창가 쪽에 앉아 어둔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리가 내게 물었다.


“아빠. 해는 환한데 있으니까 혼자 있어도 괜찮지만, 달은 캄캄한 데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봐 별이랑 같이 있는 거예요?”  


딸의 말을 듣고 창밖을 내다보니 먹물 같은 밤하늘에는 막 돋아났지 싶은 초승달과 바로 옆 환한 별 하나가 떠 있었다. 달과 별은 어찌 저리 가까이 밤하늘에 떠 있는 것일까, 어린 마음에 생각하니 무서울까 봐 서로 같이 있는 것이구나 싶었나보다. 


어둠 속 달과 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린 어린 딸의 마음과 말이 예쁘고 귀여워 한껏 인정을 했다. 


“그래, 그렇겠구나. 네 말이 꼭 맞겠구나.” 


소리는 이내 졸음에 겨워 내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잠든 딸의 등을 토닥이며 마음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도 마찬가지겠다. 서로 외롭지 말라고 나란히 곁에서 함께 사는 것이구나!’ 


달과 별이 함께 뜨는 한, 오래 전 그 일은 사라지지 않고 내내 기억의 등불을 밝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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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실 문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0)


 기도실 문살


세월이 지나면 곰삭는 것 중에는 문살도 있다. 인우재 기도실 문살이 그랬다. 아랫말 무너진 돌담의 돌을 흙과 쌓아올린 기도실에는 동쪽과 서쪽에 작은 창이 두 개 있다. 동네 어느 집인가를 헐며 나온 것을 기도실 창으로 삼았다. 햇살이 비치면 고스란히 문살이 드러나는데, 예쁜 문양으로 서로 대칭을 이루던 것이 노인네 이 빠지듯 곳곳이 빠지기 시작했다. 



문살은 헐거워지고 창호지는 삭아서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떨어진 문살을 보면 장인의 솜씨를 느끼게 된다. 무슨 연장을 사용한 것인지 작은 나무토막 양쪽 끝을 날카롭게 벼려 자기보다 큰 문살들과 어울리도록 만들었다. 큰 문살들이 휘는 곳에는 ‘V’자 형태로 움푹 파인 부분이 있어 서로가 자기 자리에 꼭 들어맞도록 했다. 못이나 접착제 없이도 서로 빈틈이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문살 전체가 활을 쏘기 전의 활줄처럼 팽팽 소리가 났겠다 싶다.  


창호지를 바르기 전에 문살부터 바로잡기로 했다. 헐거워서 떨어진 문살보다 조금 길이를 늘려 나무를 깎아 끼워보니, 제대로 모양을 잡았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하나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니 다른 곳에 있는 문살이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한쪽이 팽팽해지니까 다른 쪽이 헐거워진 탓이었다. 




곰곰 생각하다가 헐거워진 문살을 모두 떼어 냈다. 허물어지듯이 문살은 쉽게 빠졌다. 세월이 지나 사람이 늙으면 서로 맞물려 있던 뼈들도 저렇게 허물어지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문살을 모두 떼어냈을 때 남은 문양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십자 무늬였다. 십자 무늬는 다른 문살을 걸기 위한 기본구조로 아예 문틀에 고정시켜 놓은 것이었다. 


십자 무늬의 단순한 문양은 기도실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헐거워진 문살을 복원하는 대신 십자 무늬의 문살 위로 창호지를 바르니, 일부러 문살을 그렇게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기도실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요란함이든 화려함이든 내 삶이 버릴 것을 버려 그분의 뜻과 어울렸으면, 다른 문살 다 버리고 십자 무늬로 돌담 기도실과 어울리는 작은 창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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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신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1)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수난곡

No. 22 침묵하신 예수


마태수난곡 239~41

마태복음 26:60~63a

음악듣기 : https://youtu.be/m_grDwFhy40

39(33)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이르되

60. Und wiewohl viel falsche Zeugen herzutraten, funden sie doch keins. Zuletzt traten herzu zween falsche Zeugen, und sprachen :

대사

두 증인

이중창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61. Er hat gesagt: Ich kann den Tempel Gottes abbrechen und in dreien Tagen denselben bauen.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62. Und der Hohepriester stand auf und sprach zu ihm:

대사

대제사장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62. Antwortest du nichts zu dem, was diese wider dich zeugen?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3a.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63. Aber Jesus schwieg stille.

40(34)

코멘트

테너

레치타티보

나의 예수는 아무 말 없이

터무니없는 거짓에 침묵하고 계신다

그것은 그 깊은 자비하신 뜻으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심이며,

우리도 그와 같은 고난에 놓이게 될 때

그의 모습 본받아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Mein Jesus schweigt

zu falschen Lügen stille,

Um uns damit zu zeigen,

Daß sein erbarmungsvoller Wille

Für uns zum Leiden sei geneigt,

Und daß wir in der gleichen Pein

Ihm sollen ähnlich sein,

Und in Verfolgung stille schweigen

41(35)

테너

아리아

참으리, 참으리!

거짓의 혀가 나를 쏘아댄다 할지라도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고

모욕과 조소를 당하더라도

! 사랑의 하나님이 아시고

내 마음의 결백을 보상해 주시리라.

Geduld, Geduld !

Wenn mich faIsche Zungen stechen

Leid ich wider meine Schuld

Schimpf und Spott,

Ei! so mag der liebe Gott

Meines Herzens Unschuld rächen

 

한 공간 두 장면

 

대 제사장의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두 장면이 대조적으로 펼쳐집니다. 성경에는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대제사장의 집 안에서는 예수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는 베드로의 재판이 막을 올리고 있습니다. 매우 드라마틱한 대비입니다. 재판에 임하는 예수와 베드로의 모습 또한 완전히 상반됩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의 집 안에서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반면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있는 베드로는 변명과, 거짓말과, 맹세와, 저주와, 예수에 대한 부인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은 대제사장의 집례 하에 희생의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을 떠오르게 합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따르면 성막 안쪽에 뜰이 있고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 등이 있으며 그 안쪽에 성소와 지성소가 분리되어 있는데 지성소에는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마태복음 2658절에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은 번제단과 물두멍 등이 놓여 있어 각종 제사가 이루어지는 성막 뜰이라는 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한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는 제사장을 거치셔야 했고 지금 말 없는 희생 제물이 되어 성막 안쪽에 계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를 죽이려했을 뿐이지만 결국 자신의 의도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속제의 제사를 집례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간계를 부릴 뿐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구원을 한 단계씩 온전히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8~19).

  

거짓말의 특징

 

예수를 모함하여 죽이기 위한 거짓증인들이 많이 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동원되었지만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 두 증인을 불러냈습니다. 그 방법은 말꼬리를 잡고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옳거니 하고 벌떡 일어섭니다.

 

저들의 모습은 거짓에 사로잡힌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섣불리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 듣고만 있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제가 모르는 감정적 앙금이 있었기에 그런 상황에 이르렀겠고 제가 온전히 판단할 만한 처지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대화 내용으로만 볼 때 유독 한 분에게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심각한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때문에 말싸움이 시작되었는데 그분은 그 상황에 관한 자신의 논리가 막힐 때 마다 과거에 있었던 다른 일들을 끄집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상대방의 말 꼬리를 잡고 계속 싸움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끊임없이 거짓증언을 내세우고 결국 말꼬리를 잡음으로 공격하는 대제사장 무리와 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거짓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두 증인의 말은 음악적으로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휘자에 따라 솔로 이중창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리히터는 바흐가 악보에 지시한 대로 알토와 테너의 합창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거짓 증언을 보시기 바랍니다. 알토가 먼저 말을 시작하면 테너가 바로 뒤에 앵무새처럼 따라하다가 함께 끝을 맺습니다. 청문회에서 자주 보셨듯이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은 짜낸 듯 똑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거짓말의 특징이지요. 반면 진실은 그것을 전하는 방법 또한 솔직하고 자유롭습니다. 매번 다르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아도 변함없는 한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저마다 다르고 서로 상충하는 진술도 있지만 결국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흐는 이 부분을 아주 잘 포착했습니다.

 

거짓은 긴장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반복될 때 오히려 거짓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거짓에는 박제된 진열품처럼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실에는 생명이 있고 진실과 자유는 함께 거닙니다. 그래서 표현이 때마다 달라지지만 똑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편, 지휘자 칼 리히터는 합창단을 스타카토로 노래하게 함으로 거짓 증인들이 경직된 마음과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증언하는 것을 표현하게 합니다. 아마 제사장들이 입을 맞춰서 증인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이 매우 경직되었을 것입니다. 그 스타카토는 마치 예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증인의 증언 후에 나오는 오르간과 콘티누오의 후주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 맞습니다! 마치 광대들이 광대놀음을 할 때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들립니다. 그들은 경직된 자세로 나름 열심히 거짓증언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거짓 증언이 진리 자체이신 예수 앞에서 얼마나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그 후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침묵하신 예수

 

이에 대제사장은 이거다 싶었는지 무릎을 치고 일어납니다. ‘Und der Hohepriester stand auf/대제사장이 일어서서라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에서 일어나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동사는 ‘aufstehen’입니다. ‘위쪽으로라는 의미의 ‘auf’서다라는 의미의 ‘'stehen’이 결합되어 일어서다라는 새로운 동사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과거형인 ‘aufstand’가 쓰였습니다. 이런 동사를 분리 동사라 하는데 분리 동사는 문장에서 쓰일 때 앞부분이 분리되어 뒤쪽에 붙게 됩니다. ‘Und der Hohepriester stand auf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에서는 ‘auf’가 갑작스런 높은음으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이 이거다싶은 마음에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 먼저 알아봐야 할 대 제사장이 오히려 그를 죽일 억지 명분을 찾고 좋아하는 모습이나, 예수의 길을 제시하고 그 길을 따라야 할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길을 외면하고 그 길을 더럽히고 있는 모습이나 참 어이없기 그지없습니다



39번곡의 마지막 부분. 두 번째 마디에서 증인들(A., T.)의 증언에 이어지는 후주의 16분 음표 군은 우스꽝스러운 거짓 증언을 표현하고 있으며 네 번째 마디 에반겔리스트(Ev.)의 내러티브에서 auf에 사용된 높은 음은 대제사장(P.)이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마디는 예수의 침묵을 극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어 대제사장은 기세등등하여 예수를 몰아세웁니다. “Antwortest du nichts zu dem, was diese wider dich zeugen?/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예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 537절 말씀대로 희생의 어린양이 되는 길을 완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Aber Jesus schwieg stille/그러나 예수는 말없이 침묵하셨다라고 하는 에반겔리스트의 노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대사의 앞뒤로 상당히 긴 침묵이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 악보에는 그만한 길이의 쉼표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나 예수는 말없이 침묵하셨다라는 내러티브 역시 굉장히 느린 템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연주자들의 의도된 표현이지요. 이 음반에서 지휘자 리히터와 에반겔리스트 헤플리거는 단 두 마디 밖에 되지 않는 이 부분을 무려 ‘28!’라는 긴 시간 속에 담고 있습니다. 연주음악에서 이정도의 쉼표와 느린 템포는 느리다는 표현을 넘어 영원혹은 침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침묵으로 노래한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침묵을 노래할 수 있는 음악가가 가장 실력 있는 음악가입니다. 어지간한 음악적 자신감과 고집 없이는 이렇게 느린 템포로 침묵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듣는 것입니다. 소리가 없는 곳에 침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이 있어야 할 곳에 침묵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어떤 음악과 달리 마태수난곡에서의 침묵은 음악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 

 

이어지는 테너 레치타티보는 그 어떤 아리아보다도 아름답습니다. 느린 템포로 한 음 한 음 울리는 반주는 변호하고 항변하고 바로잡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침묵의 인내를 표현합니다. 이 코멘트는 예수께서 침묵하신 이유가 우리를 대신해 고난 받기 위함이며 우리도 고난 가운데서 침묵해야함을 몸소 모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심이며,

우리도 그와 같은 고난에 놓이게 될 때

그의 모습 본받아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Für uns zum Leiden sei geneigt,

Und daß wir in der gleichen Pein

Ihm sollen ähnlich sein,

Und in Verfolgung stille schweigen

 

이 가사의 독일어 표현이 의미 깊습니다. ‘Für uns zum Leiden sei geneigt/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신다라는 표현에서 관용적 표현 ‘geneigt sein, et. zu tun’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동사 ‘neigen’몸을 기울이다라는 뜻인데 우리가 무언가 시작하기 전에 몸을 그 방향으로 숙이고 무언가 관심이 가는 방향으로 몸이 쏠리듯 의도나 호감을 향한 지향성을 표현하기도합니다. , 예수는 이제 이 침묵을 시작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과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더불어 우리도 예수를 따르는 과정에서 박해(die Verfolgung)를 당할 때, 베드로처럼 거짓말이나 변명을 하지 않고 어느 시점부터는 침묵해야 함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몸소 보여 주신 모범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Geduld/참으리!

 

이어지는 유명한 테너 아리아 ‘Geduld/참으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그 침묵의 인내를 보상해 주실 것을 믿고 노래합니다. 이 유명한 아리아의 반주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단 하나의 악기가 쓰이고 있습니다. 바흐의 악보에서는 콘티누오를 제외하고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의 솔로가 반주를 하고 있습니다. 현대연주에서는 첼로가 비올라 다 감바를 대신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듣고 있는 리히터의 음반에서는 여러 대의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한 대의 악기처럼 함께 연주하면서 그 무게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 아르농쿠르, 가디너, 코프만, 헤레베헤, 스즈키와 같은 부류의 지휘자들이 추구하는 원전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HIP or period performance) 음반들은 한 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반주를 도맡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원전연주(HIP)를 선호합니다. 바흐 이후로 악기들은 끊임없이 진화했고 한 대의 비올라 다 감바로 반주를 도맡게 하는 것은 음향적으로 빈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곡을 작곡했을 당시에 바흐가 상상했던 바로 그 사운드를 재현해 내는 것이 가장 좋은 음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모두 작곡된 시대의 악기로 연주해야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지휘자 아르농쿠르는 말했었지요.

   

세상의 모든 아침

 

비올라 다 감바는 바흐 당시에 첼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비올라는 찰현악기인 비올 족악기를 의미하며 다 감바는 다리 사이에 끼고 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첼로의 원래 이름은 ‘Violoncello(비올론첼로)’인데 비올족의 작은(cello)악기라는 의미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올이라는 이름이 두 악기가 같은 혈통 안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에도 첼로의 약자는 ‘Vc.’로 표기됩니다.

 

비올라 다 감바는 첼로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활을 잡는 법도 다르고 현의 개수도 6개 혹은 7개입니다. 또한 첼로와 달리 운지를 위한 프랫(fret)이 있습니다. 현은 양의 창자를 꼬아서 만든 거트현을 사용하는데 첼로와 같이 고 장력 메탈 현이 내는 팽팽하고 섬세한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반대로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질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현 자체가 유연하기 때문에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첼로 보다 역동적인 보잉(bowing, 활놀림)이 필요한데 이렇게 온 몸으로 연주하는 듯한 시각적인 퍼포먼스도 비올라 다 감바 만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이 악기를 제대로 소개해 드리기 위해서는 영화 한 편을 소환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91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은 바흐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비올라 다 감바의 두 거장 마랭 마레(Marin Marais)와 쌩뜨 꼴롱브( Sainte-Colombe)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영화에서의 실재 연주는 현존하는 비올의 거장 조르디 사발(Jordi Savall)이 담당하였습니다.

 

영화에는 마랭 마레가 스승 꼴롱브의 숲속 오두막을 찾아 몰래 그의 연주를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꼴롱브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다라는 본인의 말 그대로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그 곳에서 영, , 육을 쏟아 부으며 홀로 연주를 합니다.

 

바흐가 예수의 침묵에 관한 이 노래의 반주에 비올라 다 감바 단 한 대를 사용한 것은 바로 꼴롱브가 내고 있는 그 소리를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마랭 마레처럼 우리도 조용히 한 고집스런 음악가를 찾아 가면 어떨까요? 아침 안개처럼 모든 감성과 소리와 영성이 낮게 침잠해 있는 영화 속의 분위기를 기억하며 영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비올라 다 감바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이 노래의 선율로 연결이 될 것입니다. Geduld의 전주 소리가 들리시나요? 이 감바 소리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1727년 겨울 라이프치히 토마스학교(Thomasschule) 건물 2층에 있는 바흐의 방에 다다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살며시 방문을 열면 램프의 불꽃이 흔들리는 추운 방에서 챔발로 앞에 앉은 바흐가 온전히 음악에 사로잡힌 채 흥얼거리며 악보에 거침없이 이 노래를 새겨놓고 있을 것입니다. 바흐의 자필악보를 보십시오. 제게는 어떤 위대한 그림 보다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림을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수난곡 41번곡 ‘Geduld!’의 자필악보 부분. (ca.1736~1740)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정성을 다하며 꾹꾹 눌러 활을 긋는 비올라 다 감바의 투박한 연주는 꼴롱브의 표현 대로 예수의 심장을 찢는소리였습니다. 이 노래의 비올라 다 감바 소리는 예수께서 느꼈을 법한 홀로됨과, 침묵하기 위해 두려움과 억울함을 억누르며 소리 없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침 바흐의 먼 후계자인 33대 토마스 칸토어(Thomaskantor)인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빌러(Georg Christoph Biller)의 지휘로 비올라 다 감바의 함께 연주한 영상이 있어 여러분들께 깊은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예수의 침묵을 깊이 묵상함으로 오늘도 예수의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시간이 되셨기를 소망합니다.

 

https://youtu.be/68ubLDhqwlw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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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석남사, 마음의 결을 빗는 산책길

신동숙의 글밭(140)


언양 석남사, 마음의 결을 빗는 산책길


옆 마을에 사는 벗님이 우리 마을에 왔습니다. 그냥 같이 길을 걸으려고 온 것입니다. 걷다가 배가 고프면 눈에 띄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되고, 또 걷다가 쉬고 싶으면 조용한 찻집에 앉아서 차를 마셔도 되는, 걸어도 걷지 않아도 좋을 다정한 산책길입니다. 


예정했던 태화강변길은 오늘따라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햇살이 더워 몸에 땀이 배일 거 같아서, 걷기로 정한 곳이 언양 석남사로 가는 숲길입니다. 누구 하나 숨 가쁘게 걷지 않아도 되는 길. 서로의 말소리가 들릴 만큼의 빈 하늘을 사이에 두고 얼마든지 자유로이 걸어도 좋을 넉넉한 산책길입니다. 


소나무의 새순이 싱그러운 산길, 아침 골목길에 본 냉이꽃이 우리보다 먼저 와 기다리는 산길, 여기서도 제비꽃이 꽃 중엔 작은 산길, 외진 응달에도 이끼가 푸른 산길, 높이 뻗은 연두빛 새순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걸어도 무겁지 않은 산책길입니다.


새순마다 살이 올라 언뜻언뜻 더운 햇살을 가려주는 석남사의 숲 속 길은 한 여름에 걸어도 등에 땀이 배이지 않는 길입니다. 절로 오르는 오솔길을 따라서 우리는 오르고, 계곡물은 자꾸만 내려갑니다. 




오르는 길이라도 숨이 가슴 위로 차오르지 않도록 조율하는 느리고 느긋한 발걸음입니다. 걸음마다 몸에 붙어 있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숨길마다 몸에 숨어 있는 긴장을 풀어놓기에 좋은 석남사 숲길입니다. 


혼자서 사색하기에 그리고 둘이서 말을 나누기에도 좋은 숲길을 걸으며 마음의 결을 빗습니다. 한결같은 소나무가, 살랑이는 연두빛 새순이, 별스럽지 않은 산바람이, 오래된 계곡물 소리가 마음의 결을 자꾸만 빗어줍니다. 


자연의 손길이 아무리 슬고 빗어도 마음의 결은 상하지 않기에. 문득 이런 자연을 빚어 놓은 손길이 궁금해집니다. 계곡의 물이 돌을 슬며 쉼없이 흘러 순한 돌로 빗듯이, 산은 제 모난 마음의 결을 자꾸만 순하게 빗어줍니다.


산길을 걷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두 다리를 움직여 걸어가는 거룩한 일입니다. 걸음마다 뜬 눈으로 햇살을 비추듯 자연의 벗들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일.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도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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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차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69)


입장 차이




오래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유머 코너에서 읽은 글이 있다. 갈아 끼울 40와트짜리 전구를 사러 상점에 들러 점원에게 말했다. 벌써 몇 달 사이에 전구를 세 개나 갈았다고, 전구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자 점원이 불쾌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천만에요. 그 전구가 우리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물건입니다!”


부디 세상과 교회가 나누는 대화가 이런 것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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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깨달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68)


뒤늦은 깨달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막상 일을 겪을 때는 그 일이 어떤 일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중에는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 일러주긴 일러주지만 뒤늦게 후회하면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공부의 의미를 공부할 때는 몰랐다가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젊음의 의미를 젊었을 때는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되고, 일의 의미를, 사랑의 의미를, 건강의 의미를, 부모님의 의미를, 가족의 의미를, 친구의 의미를, 이웃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깨닫는 경우들이 있다. 


“오 맙소사,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니!” 했던 소로우의 후회는, 우리 모두의 후회일 가능성이 크다. ‘철들자 망령’이라는 우리 속담은 참으로 두려운 말이지 싶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 세계를 멈춰 서게 한 이 일을 두고 이렇게 저렇게 진단하고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는 결코 이전과는 같은 수 없다는 말에 공감을 할 뿐, 무엇이 어떻게 다를지는 아직 헤아릴 수가 없는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자동차가 달리고 사람이 오가던 거리가 텅 텅 비자 이곳의 본래 주인은 자신들이라는 듯 야생동물들이 나타나 활보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연한 듯이 누리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짐작도 못하던 일들이 일상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부디 이 땅에서 일어나게 될 변화가 의미 있는 변화이기를. 의미 있는 공존을 위한 평화로운 것이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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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유난히도 빛나는 별

신동숙의 글밭(139)


아픔은 유난히도 빛나는 별

-우체국 집배원 편-


하루를 살다가 더러 아플 때가 있습니다. 아픈 이유는 많겠지만, 맨 처음 이유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맨 처음의 이유입니다. 몸이 있고,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아픔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없다면 아픔도 없는 것인지, 아픔 너머의 세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는 이유로 아픔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며 온갖 셈으로 헤아리다 보면,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날까지 본전을 따져 보아도 밑지거나 억울해할 일은 아니라며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사람한테 위로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추스르는 일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어려선 알 수 없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 거인처럼 커질 때면, 마을 뒷산 바위산에 올라가 바위에 앉아서 하늘도 보고 장난감처럼 작아진 마을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렇게 있다가 마음이 구름처럼 가벼워지면 털고 일어나 산을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내려오던 산길에는 작은 풀꽃들이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토끼풀로 반지와 팔찌도 만들고, 배춧대를 꺾어서 껍질을 벗겨 먹으며 토끼처럼 폴짝 폴짝 산길을 내려오던 추억이 생생합니다. 그때의 마음이 이어져 지금은 눈을 감아도 보이는 하늘입니다. 


그렇게 하늘로 이어진 마음 속 우주를 홀로 유영하다 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주위에 가까운 얼굴일 때도 있지만, 먼 하늘의 별처럼 알지 못하는 얼굴들도 가까이 와서는 어느덧 한데 섞입니다. 하늘 안에선 가족과 타인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마음 안에선 나와 너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작은 별 언덕 위에 서서 "나는 외롭다!"고 세 번 외친, 어린왕자의 수많은 저 별들 중에서 유난히도 빛나는 별 하나에 마음이 머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하나의 별은 가장 큰 별입니다. 가장 큰 별은 가장 아픈 사람입니다. 이 세상 어디선가 저보다 더 아픈 사람이 됩니다. 


높고 먼 밤하늘을 올려다 보던 그 헤아림은 어느새 가장 낮고 작은 땅을 비추고 있습니다. 뒷산 바위산을 내려오면서 만나던 토끼풀, 배추꽃, 달개비, 꽃다지처럼 작은 풀꽃들에 마음이 머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세상 어디선가 저보다 더 작고 아픈 생명이 됩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다는 이유로, 하나의 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같은 이유로 이 세상의 가장 낮은 풀꽃을 친구처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주신 선물입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아픔으로인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삶의 경이로운 신비입니다. 


저의 작은 아픔이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서 오늘 만난 아픔인, 유난히도 빛나는 별 하나는 우체국 집배원입니다. 


비가 오면 오토바이는 우산도 없이 빗길을 달립니다. 눈이 오면 오토바이는 똑같이 빙판길을 달려야 합니다. 어깨 힘줄이 끊어지더래도 오토바이는 넘어져선 안됩니다.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는 일은 곧 큰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걸 누구든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일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루 평균 1000여 건에 달하는 배달 물량입니다. 받는 이가 집에 없어도, 단 한 건의 배달 사고는 그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됩니다. 


엄마인 제가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하도록  신신당부하는 것이 있다면 오토바이입니다. 가끔 운전을 하다가 제 차 앞에 짐을 실은 오토바이가 보이면,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뒤따를 때가 있습니다. 마치 제가 오토바이 호위병이 된 것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뒤따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타까운 순간은 언제까지 제 차가 오토바이를 호위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도로 위에서 서로가 멀어져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면 집배원이 타고 있는 것이 오토바이가 아닌 비와 눈을 가릴 수 있는 경차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한국의 택배 서비스 만족도 1위는 우체국 택배입니다. 서비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큰 만큼 우체국 집배원의 근무 환경에 대한 관심과 마음도 밝고 크게 비추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우체국 집배원을 바라볼 때면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겁습니다. 몇 년 전에 매스컴에서 집배원의 오토바이를 경차로 교체한다는 기사를 보고서 혼자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저희 집 대문 앞에서 우편물을 주고 가시는 집배원 아저씨는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십니다.


과음과 과속과 과로는 하나님도 막을 수 없다는 우스게 소리가 있습니다. 배달 서비스 만족도 1위를 위해 달려온 마음처럼, 우체국 집배원 근무 만족도 1위를 위한 마음과 관심이 꾸준히 모아지고 이어져 개선되기를 기도합니다. 


우체국 집배원은 남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고 소중한 아들이니까요. 오늘 저 한 사람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작은 움틈이기도 합니다. 한 알의 씨앗을 심는 심정입니다. 흘리는 눈물은 빗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흘러서 세상으로 좁다란 물길이 나면 작은 생명들 목을 축이는 샘물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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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근충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67)


개근충


이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있다. 고등학교 3년 개근 메달이었다. 따로 보관하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딘가에 있다가 나타났다. 아, 내가 고등학교 때 3년 개근을 했었구나 싶었다. 그 일을 따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은 의왕이었고 고등학교는 수원에 있었다. 마침 수원에 새로 세워진 학교가 미션스쿨이어서 일부러 시험을 보고 선택한 학교였다.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가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기차 통학, 타야 할 기차를 놓치면 지각이어서 기차역으로 내달리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 데는 그 때 배인 습관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핸가는 홍수가 났고, 차편이 끊겨 학교에 갈 수가 없는 날이 있었는데, 늦긴 했지만 그래도 학교에 빠지지는 않았다. 특별히 공부에 열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 빠지는 일은 생각 밖의 일이었다. 


3년 개근상으로 받은 메달을 특별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막상 메달을 보니 그래도 아주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 싶다. 건강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고, 다치거나 사고가 없었으니 가능한 일,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로 여겨진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 중에 ‘개근충’이 있었다. 개근을 한 아이를 친구들이 개근충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백충’ ‘삼백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한 달 수입이 이백만원 혹은 삼백만원인 아이를 조롱하며 부르는 말이라고 했다. ‘충’은 ‘벌레 충’(蟲)이었던 것이다. 


개근충이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어디 한 번 여행도 다녀오지 못하는, 그래서 학교나 꼬박 다닐 수밖에 없는 아이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세상에, 성실함이 조롱받는 세상이 되다니! 공식과 지식보다도 성실과 존중의 의미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할 아이들이, 오히려 성실한 친구를 조롱하고 있다니!


어디서부터 바로 잡혀야 할까. 누군가 남 탓을 하자면 탓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만, 그럴 것이 없는 것이 교회 또한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우리의 익숙한 고백처럼 예수가 우리의 길이라면 예수는 우리 삶의 방향이자 방식이 되어야 한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처럼 살아갈 사람을 키워내야 한다. 약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세워야 한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그 일로부터 얼마나 멀리 멀어져 있는 것인지, 그 거리가 너무나도 아뜩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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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반가운 골방

신동숙의 글밭(138)


햇살이 반가운 골방


아침 설거지를 마친 후 산책 준비를 하러 방으로 들었습니다. 작은 창으로 드는 한 줄기 햇살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해가 뜨는 아침에도 빛줄기가 들지 않는 구석진 방이 제 방입니다. 잠시 비추다 사라질 좁다란 햇살이라도 그저 반가운 골방이라서, 집밖에선 흔한 햇살이 골방에서는 환하게 피워서 안겨 주시는 꽃다발 같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20대에 읽은 후 지금껏 제 삶에 영향을 준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무리 좁은 골방에 쪽창이라도, 밖으로 보이는 한 조각의 하늘과 한 줄기의 햇살에도 고마워할 수 있는, 너른 마음을 어느 한 구석에 보석처럼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색과 기도는 그 어디서든 감옥일지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깨우침입니다.


침대 위로 내린 햇살이 누운건지 앉은건지, 머릿속으로 실없는 생각이 봄바람처럼 스치다가, 한낮에 잠시나마 골방까지 찾아들어온 햇살이 고맙고 순간 애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옆집의 회색벽 뿐인데, 어디에 해가 있나 싶어 빛을 따라 올려다보았습니다. 저 높이 길고 좁다란 하늘 위에, 여기 있다며 해가 반짝합니다. 얼마 전에 아들과 방을 바꾸었더니, 오래된 집이라도 새집에 새방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방을 바꾸어야 할 때가 오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가구 배치를 바꾸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혼자서 옮겨야 할 때면, 가구를 들어서 옮기는 게 힘에 부쳐서 온몸으로 밀고 당기며 힘겹게 옮기게 됩니다. 그렇게 같이 세월이 흐른 집이라 나무로 된 마루에는 긴 생채기가 나기도 하고 더러는 찍힌 자국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나온 삶의 흔적이라 여기면 그리 밉지만은 않습니다. 





갈아입으려던 옷 그대로 입은 채, 햇살에 등을 세우고 앉아서 가만 눈을 감습니다. 들려오는 소리가 바람결인지 고르는 제 숨결인지 더듬으며, 또 다시 태초의 어둠과 혼돈 속인 듯 헤매이다가 차츰 마음이 한 점에 머무는 순간이 옵니다.


알을 품듯 가슴으로 들어온 얼굴 하나를 품습니다. 고요히 품고 있노라면 어둡던 가슴에도 해가 뜹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둔 가슴 저 낮은 곳으로부터 따뜻해져 오는 것입니다. 평온한 순간입니다.


잠시 고요한가 싶더니 갑자기 건넌방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닥치듯 달려오는 바람소리에, 내 안의 평온이 한 순간 깨집니다. 앉았는 침대 위로 털썩 딸아이가 앉습니다. 요즘 온라인 등교로 집안에서 오래 생활하게 된 딸아이는 네살 때 하던 미운짓을 능청스럽게도 해댑니다.


아침밥을 먹자며 방에서 나오라고 할 때는 엄마 진을 다 뺄 만큼 꿈쩍도 않던 바윗돌이더니, 단단하던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참새처럼 제비처럼 날아들어서 평온을 깹니다. 


하는 폼이 얄밉기도 하고 조그만 입이 귀엽기도 해서, 엄마랑 같이 앉았자고 했더니, 뭐라 뭐라 지저귀면서 날아가고 없습니다. 잠시 들었다 사라지는 햇살처럼 고요한 순간은 언제나 이렇게 오래 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루를 살아가다가 잠시 잠깐 머물러 마주한 그 고요한 마음에 깃드는 온기 한 다발이면 또 하루를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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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66)


별 하나


인우재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오랜만의 일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곳곳에 풀을 베고, 베어놓은 나무를 정리하다 보니 금방 하루해가 기울었다.


대강 때우려던 저녁이었는데, 병철 씨가 저녁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 마침 내리는 비, 우산을 쓰고 아랫작실로 내려갔다. 마을길을 걷는 것도 오랜만이다. 산에서 따온 두릅과 취나물, 상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성찬이었다. 


비도 오는데 어찌 걸어서 가느냐며 트럭을 몰고 나선 병철 씨 차를 타고 다시 인우재로 올랐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빗물 떨어지는 마루에 앉아 바라보니 앞산에 비구름이 가득하다. 누구의 집일까, 불빛 하나가 붉은 점처럼 빛났다. 사방 가득한 어둠속 유일한 불빛이었다. 



비오는 마루에 걸터앉아 그 불빛 바라보고 있자니, 우주 속 지구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다. 우주에서 보자면 지구는 사방 어둠속 붉게 빛나는 저 작은 점 하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었다. 


크게 아웅다웅할 일도, 크게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일도 없는 것이었다. 굴뚝에서 내려와 낮게 퍼지는 연기처럼, 나직한 목소리 잠잠한 걸음으로 살아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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