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다른 교주

신동숙의 글밭(89)

 

예수와 다른 교주

 

예수는 무릎을 꿇어 앉아,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깁니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너희를 섬기며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가서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목숨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교주는 자기 자신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어 앉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지령한 것 같이 너희는 가서 세상과 이웃을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퍼뜨리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섬김의 사랑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지요.

 

예수는 병든 자를 고치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소경이 눈을 뜨게 하고, 혈우병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잡고 나음을 받게 하며, 구원을 받았다 함을 두고 ㅡ 너희의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렇게 자신을 철저히 비움으로 예수는 진리의 몸이 됩니다.

 

그러나, 교주는 병든 자, 마음이 아픈자, 마음이 곤고한 자, 나약하고 유순한 자에게 ㅡ 나음과 구원을 두고 교주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며, 모든 영광을 오직 자신만이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탐욕과 몰염치입니다. 신도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가족과 직장, 친구, 세상을 버리게 합니다. 그 이득으로 교주는 호의호식을 누리며 거짓됨과 속임수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예수는 99 마리의 양을 안전히 두고,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직접 찾아나서는 온전한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심으로 진리의 몸이 됩니다.

 

그러나, 교주는 10만 명 이상의 신도가, 오로지 교주 한 명을 위해서 움직이게 합니다. 그렇게 진리의 노선을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교주에게선 신도들 한 명 한 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안보입니다.

 

예수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목숨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주는 사랑하라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하지만 저는 한 점 별빛 만큼의 사랑에 소망을 두기로 합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도 어딘가에는 숨었을, 선함과 양심과 책임감이 있을 테니까요. 예수가 가시면서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공평하게 주신 진리의 영, 성령 곧 양심의 등불이 켜지기를요.

 

 

 

진실과 진리에 뿌리를 내리는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언제나 유일한 구원과 길이 됩니다. 진실과 진리를 외면한 속임수와 거짓된 믿음과 행위와 대중적이고 선동적인 충동질은 결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킬 수가 없는 일입니다. 교주가 신도를 인격적으로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는 유일한 왕이란,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지도자 뿐입니다. 예수처럼요.

 

예수는 제자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까지, 스스로 죽기까지 세상을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보이지 못한 사랑으로 진리의 몸이 되십니다.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교주는 제자들과 신도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 예수와는 정반대로 교주는 자신을 위해서 믿는 자들에게 모든 걸 바치라고 세뇌를 시킵니다. 신도들의 재산과 인생과 영혼까지도, 가족과 직장, 친구, 세상을 다 버리고 자신의 말만 따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만이 이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 됩니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지만, 마음밭에 한 알의 씨앗을 심듯, 알을 품듯이 예수를 품습니다. 바로 그 시선으로 나와 타인과 세상과 생명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예수, 성령입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진리와 양심의 등불로부터 시작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사랑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이미 내 안에 계시는 예수. 이미 내 안에 계시는 성령. 그렇게 진리와 내 안에 양심이 살아 있도록, 손바닥으로 맑은 하늘을 가리지 않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오.' 별빛처럼 햇살처럼, 그렇게 은총으로 주시는 내면의 빛으로 내 발에 등불 하나. 그로부터 시작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스스로 면역력을 기르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독감보다 치사율이 낮은 코로나라고 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모든 생명이 이에서 남이니라', 나와 너와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한 봄햇살처럼 언제까지나 마지막까지도 따스하기를 빕니다.

 

사랑, 사랑입니다. 진리의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입니다.
태양처럼 한결같은 사랑만이 우리에겐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성령, 예수가 태양이 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사히 지나가기를 빕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봄햇살처럼 사랑하기를요.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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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음

  •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2.23 11:4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7)

 

잃어버린 마음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낡은 서류봉투를 발견했다. 발견했다기보다는 책장에 놓여 있던 봉투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기억나지 않아 열어보았더니 봉투 안에는 몇 가지 자료들이 들어있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전해주신 봉투였다.


1984년 감신대 학사 및 석사학위 수여식 순서지, 1987년 5월 2일 결혼식 청첩장, 1988년 단강교회 성전 및 목사관 봉헌예배 순서지, 단강초등학교 학생들이 백악관을 배경으로 찍은 미국방문 사진이 1면에 실린 2001년 5월 미주한국일보, 단강마을 이야기를 담은 책 <작은교회 이야기>에 관한 인터뷰가 실린 2012년 1월 13일자 한 일간지, 지난 시간 소중했던 일들에 대한 자료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중요하다 싶은 날에 대한 자료를 따로 보관해 오시다가 전해준 것이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자료 중의 하나가 ‘88년 크리스챤 신인문예 당선작’인 동화 ‘소리새’였다. <크리스챤신문> 두 면에 걸쳐 소리새를 실었는데, 신문에는 심사평과 당선소감도 실려 있었다.

 

신문은 누렇게 빛이 바랬고 몇 군데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심사평은 박홍근 선생님이 썼다. ‘나뭇잎배’와 ‘모래성’을 작사한 분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동문학가시다. ‘나뭇잎배’와 ‘모래성’은 언제라도 입가에 맴도는 정겨운 노래들이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사알살 떠다니겠지// 연못에다 띄워 논 나뭇잎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살랑살랑 바람에 소곤거리는/ 갈잎새는 혼자서 떠다니겠지>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가고/ 내가 만든 모래성이 사라져 가니/ 산 위에는 별이 홀로 반짝거려요// 밀려오는 물결에 자취도 없이/ 모래성이 하나 둘 허물어지고/ 파도가 어두움을 실어 올 때에/ 마을에는 호롱불이 곱게 켜져요>

 

심사평이 새로웠다.


<응모작품의 대부분은 소재가 평범한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재미있는 것도 있었으나 리얼리티의 문제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당선작으로 한희철 지음 <소리새>를 선정했다. <소리새>는 상징성이 짙고 강한 주제의식과 깊이가 있는 동화이다. 이 작품은 대화가 없이 지문으로만 서술되어 있는 동화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장도 나무랄 데가 없다. “그 노래는 마치 빗줄기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등 표현이 좋은 대목도 많다.
수난의 아픔과 희생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또 인간의 천박한 행동을 꾸짖기도 한다. 소리새의 노래는 한 무리의 조상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모두는 그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소리새의 노래를 듣는 감각적인 장면은 환상적이며 승화된 느낌을 준다. 서슴지 않고 당선작으로 정한 것이 기쁘다.>

 

내게는 더없이 고마운 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어깨가 으쓱해질 만큼 칭찬을 들었던 것인데, 그보다 더 고마웠던 것이 있었다. 당시 나는 동화를 쓰면서도 내가 쓰는 것이 동화일까 싶었다. 주제를 살린다며 쓰다 보니 내가 보기에도 너무 무겁고 진지하다 여겨졌다. 선생님의 칭찬은 내가 쓰는 것도 동화라고, 그게 동화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다.

 

한창 젊을 때의 흑백사진이 박힌 당선소감도 감회가 새로웠다.


<사십인가 오십인가 동화는 그 나이 되어서 쓰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을 사실로 믿으며, 몇 분의 동화를 부러움으로 읽던 때였습니다. 소리새를 따라 우리도 발 묶어 떠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면 ‘내 나라 이 땅’과 ‘인간다움’이라는 곳 아닐지 모르겠다며 어색함 접고 처음으로 썼던 글이었습니다. 떠날 수 없는 땅에 끝내 남아 마지막 노래 부를 자가 그립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시절 탓이었을 겁니다. 그날 이후 소리새는 늘 제 맘속에 있었지만 왠지 박제된 새 같았습니다. 언제나 살아서 날아오를까, 그 기다림은 누구보다도 저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한 격려가 참 기쁘고 고맙습니다. 한동안 힘들기도 했거든요. 한 작품보다는 쓰고자 하는 글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가르쳐 주신 것 같아 기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과 크리스챤신문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웃음 많은 첫딸 소리에게 이 기쁨을 모두 주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간절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동화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속에 찾아와 우물처럼 자리 잡은 이야기들, 손에 군살이 박히도록 두레박을 내리고는 했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린 지가 꽤나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전해준 봉투 속에서 만난 처음으로 썼던 동화 ‘소리새’, 그 때의 뜨거움과 간절함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내다보는 창문 밖으로 봄비라 하기에는 성급하고 겨울비라 하기에는 게으른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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