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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45

다른 것은 없었어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0) 다른 것은 없었어요 다 빌려 쓰는 것이었어요 다 놓고 가는 것이었고요 신발도 옷도 책도 공책도 연필도 지우개도 햇빛도 바람도 몸도 마음도 웃음도 눈물도 시간도 계절도 모두 빌려 쓰는 것 모두 놓고 가는 것 세상에 다른 것은 없었어요 2020. 1. 5.
무릎을 땅으로 신동숙의 글밭(49) 무릎을 땅으로 "넌 학생인데, 실수로 신호를 잘못 봤다고 말하지!" 함께 병실을 쓰시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면회 온 언니들, 아주머니들, 어른들의 안타까워서 하는 말들. "어쨌거나 횡단보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를 앞둔 4월, 벚꽃이 환하던 어느날 나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넜으니까. 그 순간엔 마치 빨간불에 건너도 될 것처럼 모든 상황이 받쳐 주긴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건 교통 법규, 약속을 어기는 일이니까. 내일 시험을 앞둔 일요일 밤,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밤 9시가 넘어서 버스에서 내렸다. 집에 올 때 바게트 빵.. 2020. 1. 4.
하나님의 마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69) 하나님의 마음 스키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규영이였다.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막내가 방학을 맞아 잠시 다녀가며 한국에 나오면 스키를 탈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식구들 중에 스키를 타 본 경험은 아무도 없었다. 막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독일에서 취직이 되어 직장생활을 시작한 규민이를 제외한 4식구가 처음으로 스키를 배웠다. 신발부터 옷까지, 스키는 장비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장비를 착용하고서 받은 초보자 강습, 재미있게도 스키는 넘어지는 법부터 배웠다. 모두가 왕초보가 되어 스키를 배우며 식구들이 놀랐던 것 두 가지가 있다. 별로 운동과 친하지 않은 큰딸 소리가 금방 스키를 탄 것과, 어떤 운동이든 잘 해서 금방 탈 줄 알았던 아빠(이 몸)가 넘어지기만.. 2020. 1. 4.
오래 가는 향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68) 오래 가는 향기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을 두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가복음 14:9)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2천년 세월을 지난 오늘 우리도 그 여인이 한 일을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향기를 흉내 내는 향수가 있다. 잠깐 있다 사라지는 향기도 있다. 하지만 오래 가는 향기도 있다. 세월이 지나가도 지워지지 않는, 오늘 우리들의 삶과 믿음이 오래 가는 향기가 될 수 있다면! 2020. 1. 3.
햇살이 온다 신동숙의 글밭(48) 햇살이 온다 햇살이 온다 환한 그리움으로 산산이 부서져 땅의 생명 감싸는 당기는 건 가슴 속 해인가 뿌리가 깊어진다 선한 그리움으로 산산이 실뿌리로 땅 속 생명 살리는 당기는 건 지구 속 핵인가 2020. 1. 3.
설거지산을 옮기며 신동숙의 글밭(47) 설거지산을 옮기며 먹고 돌아서면 설거지가 쌓입니다. 식탁 위, 싱크대 선반, 개수대에는 음식물이 묻거나 조금씩 남은 크고 작은 냄비와 그릇과 접시들. 물컵만 해도 가족수 대로 사용하다 보면 우유나 커피 등 다른 음료컵까지 쳐서 열 개는 되니까요. 가족들이 다 함께 한끼 식사를 맛있게 먹고 난 후, 빈 그릇들을 개수대에 모으다 보면 점점 쌓여서 모양 그대로 설거지산이 됩니다. 그렇게 설거지산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일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한 생각이 듭니다. 하루 동안 우리의 눈과 귀, 의식과 무의식 중에 먹는 수많은 정보들. 읽기만 하고 덮어둔 책 내용들이 내면 속에선 정리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요. 사색과 묵상을 통해 정리되거나 .. 2020. 1. 2.
가라앉은 목소리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67) 가라앉은 목소리 송구영신예배를 앞두고 끝까지 망설인 시간이 있었다. 도유식이었다. 두어 달 전 성북지방 목회자 세미나 시간에 강사로 온 감신대 박해정 교수는 교회에서 도유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회복되기를 바라는 시간으로 도유식을 꼽았다. 진정한 예배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경험에 의하면 도유식은 참 은혜로운 예식이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가 있겠다 싶다. 물론 내 짐작이다. 하나는 성별이다. 주님은 모세에게 성막과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바르게 하셨다.(레위기 8:10) 다른 하나는, 치유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아픈 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2020. 1. 1.
붕어빵 한 봉투와 첫 마음 신동숙의 글밭(46) 붕어빵 한 봉투와 첫 마음 마당가 복순이 물그릇에 담긴 물이 껑껑 얼었습니다. 얼음이 껑껑 얼면 파래가 맛있다던 친정 엄마의 말씀이 겨울바람결처럼 볼을 스치며 맑게 지나갑니다. 개밥그릇엔 식구들이 아침에 먹다 남긴 삶은 계란, 군고구마, 사료를 따끈한 물에 말아서 부어주면 김이 하얗게 피어오릅니다. 그러면 복순이도 마음이 좋아서 잘도 먹습니다. 거리마다 골목 어귀마다 눈에 띄는 풍경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 밤길을 환하게 밝히는 붕어빵 장사입니다. 검정색 롱패딩을 입은 중·고등학생이,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선 젊은 엄마가,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퇴근길의 아버지가 재촉하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서서 착하게 기다리는 집. 따끈한 붕어빵 종이봉투를 건네는 손과 받아든 얼굴이 환하고 따끈.. 2020. 1. 1.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66)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내게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남은 구절 중에는 윤동주의 ‘서시’도 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지위나 재산 등이 아니라 사소한 것, 의외의 것, 예를 들면 말 한 마디나 어투, 그가 보이는 몸짓이나 태도 등이 그의 존재를 충분히 말할 때가 있다. 윤동주가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하는데 내게는 이 한 구절이면 족하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사랑하려고 했던, 사랑과 사랑하려 했던 사이를 부끄러워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전이었다. 예배당과 별관 사이에 있는 중정에 몇 가지 허름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교회 안에 있는 비품 중에서 버릴 것들을 .. 2020.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