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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45

빛바랜 시간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3) 빛바랜 시간들 첫 목회지 단강에서 지낼 때 매주 만들던 주보가 있다. 이란 소식지였다. 원고는 내가 썼고, 옮기기는 아내가 옮겼다. 특유의 지렁이 글씨체였기 때문이었다. 은 손글씨로 만든 조촐한 주보였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적었다. 내게는 땅끝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적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의 아픔을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조심스럽게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동네에선 젊은 새댁인 준이 엄마가 주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목사님, 욕이라도 좋으니 우리 얘기를 써 주세요.” 민들레 씨앗 퍼지듯 이야기가 번져 700여 명이 독자가 생겼고, 단강마을 이야기를 접하는 분들도 단강을 마음의 고향처럼 여겨 단강은 더욱 소중한 동네가 .. 2020. 1. 22.
초승달과 가로등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2) 초승달과 가로등 밤새워 이야기를 나눴겠구나. 후미진 골목의 가로등과 새벽하늘의 초승달 어둠 속 깨어 있던 것들끼리. 2020. 1. 22.
북소리가 들리거든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1) 북소리가 들리거든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무리들, 바라바가 흉악범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그들은 한결같다. 무리가 그렇게 외친 것을 두고 마가복음은 대제사장들이 그들을 선동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마가복음 15:11) 대제사장들의 선동, 충동, 사주, 부추김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 무리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태엽을 감으면 감은 만큼 움직이는 인형이다. 그리도 엄청난 일을 그리도 가볍게 하다니. 말씀을 나누는 시간, 나 자신에게 이르듯 교우들에게 말한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목소리를 높이거나 춤을 추지 마세요. 그 북을 누가 치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세요.” 2020. 1. 22.
눈을 감으면 신동숙의 글밭(63) 눈을 감으면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어 눈을 감으면 어둠입니다 익숙함에 무뎌진 시선을 거두어 눈을 감으면 혼돈입니다 탐욕에 가리워진 시선을 거두어 눈을 감으면 고독입니다 그냥 그렇게 아무도 없는 눈을 감으면 태초의 공간입니다 비로소 마음이 머무는 고독의 사랑방 침묵 속 쉼을 얻습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처음입니다 눈을 뜨면 첫걸음입니다 2020. 1. 22.
옥수수와 태경이와 함께 흐르는 강물 신동숙의 글밭(62) 옥수수와 태경이와 함께 흐르는 강물 옥수수를 삶고 있는데, 골목에서 아이들 소리가 떠들썩하다. 세 살 난 딸아이도 호기심이 발동을 했다. 조용하던 동네가 모처럼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잔칫날 같다. 압력솥에 추가 신나게 돌아가는 소리에 조바심이 다 난다. 다행히 아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우리집 앞 공터에서 이리저리 놀고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옥수수를 뚝 반으로 쪼개고, 나무젓가락을 쪽 반으로 갈라서 옥수수를 하나씩 꽂아 쟁반에 담아서 골목으로 나갔다. 핫도그 모양으로 젓가락에 꽂은 옥수수를 하나씩 아이들 손에 쥐어 주면서 나이와 이름을 묻는다. 네 살, 여섯 살, 1~2학년, 키가 제일 큰 아이가 5학년이란다. 다들 우리 동네 아이들이라는 말이 반갑다. 옥수수 먹으.. 2020. 1. 22.
내 어깨에 진 짐이 무거우면, 가벼웁게 신동숙의 글밭(61) 내 어깨에 진 짐이 무거우면, 가벼웁게 아들은 아침부터 티비를 켜면서 쇼파에 자리를 잡고는 한 마리 봉황새처럼 이불을 친친 감고서 둥지처럼 포근하게 만듭니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은 모양새입니다. 아침식사를 챙기고 사과와 단감을 깎아 주고는 억지로 데리고 나오려다가, 먼저 가 있을 테니, 오게 되면 딸기 쥬스와 빵을 사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나옵니다. 반납할 대여섯 권의 책과 읽을 책과 노트와 필기구와 물통을 넣은 커다란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맵니다. 몸을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로 순간 숨이 푹 땅으로 내려앉을 듯 하지만, 한쪽 귀에만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말씀이 어둡고 구석진 마음마다 밝혀주는 햇살 같아서 발걸음을 가벼웁게 해줍니다. 집을 나서고 보니 5일 장날입니다. 아침밥이.. 2020. 1. 18.
엄마, 태워줘! 신동숙의 글밭(60) 엄마, 태워줘! 엄마, 태워줘! 버스 타고 가거라 골목길 걷다가 강아지풀 보면 눈인사도 하고 돌부리에 잠시 멈춰도 보고 넘어지면 털고 일어나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콩나물 시루 속 한 가닥 콩나물이 되면 옆에 사람 발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을 옮기는 함께 걷는 길 평화의 길 사랑의 길 버스 타고 가는 길 2020. 1. 18.
퍼즐 맞추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0) 퍼즐 맞추기 몰랐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이끄시는 방법 중에는 새로운 만남이라는 방법이 있지 싶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두 사람과 점심 식사를 했다. 정릉교회에 부임을 한 뒤로 예배 시간에 자주 얼굴을 대하게 되는 젊은 내외가 있었다. 새벽예배는 물론 금요심야기도회에도 거의 빠지지 않았고, 설교 내용을 열심히 적을 만큼 예배에 집중하는 내외였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다가 두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고, 처음으로 차 한 잔을 나누게 되었다. 남편이 국민대 교수라는 것, 주일에 출석하여 섬기는 교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점심을 약속하게 되었던 것인데, 함께 식사를 하며 .. 2020. 1. 18.
좀 좋은 거울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9) 좀 좋은 거울 고흐가 동생 테오와 나눈 편지 중에 거울 이야기가 있다. 지금이야 위대한 화가로 칭송과 사랑을 받지만, 살아생전 고흐는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가난과 외로움이 그의 밥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형의 처지와 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주었던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며 고흐는 어느 날 이렇게 쓴다. “모델을 구하지 못해서 대신 내 얼굴을 그리기 위해 일부러 좀 좋은 거울을 샀다.”(1888년 9월) 고흐의 이 짧은 한 마디 말을 떠올릴 때면 나는 먹먹해진다. 비구름에 덮인 먼 산 보듯 막막해진다. 울컥, 마음 끝이 젖어온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절대의 고독과, 물감조차도 아껴야 하는 극한의 가난, 그런 상황에서도 놓을 수 없었던 그림, 그림은 고흐와 세.. 2020.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