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묵상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14)

 

이슬 묵상

 

가을로 접어들며 하루 한 꼭지씩 이어오고 있는 글이 있다. 이슬에 관한 글이다. 밤새 기온이 내려가면 공기 중에 있던 수증기가 물방울로 맺힌다. 애써 골라 자리를 찾은 것인지 하필이면 풀잎이나 꽃잎 끝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찔하게 한다. 게다가 수명도 짧다. 아침 해가 뜨면 어느 샌지 사라진다. 이슬이 어느 순간 생겼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세상에 누가 있을까. 언제 왔다가 언제 가는지를 모르는 신비한 걸음, 이슬은 그런 존재지 싶다.

 

될 수 있으면 가장 짤막하게 쓰려 하는 것은, 그것이 이슬과 어울린다 싶기 때문이다. 어찌 이슬에 군더더기가 있겠는가. 맺히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눈물겨울 만큼 짧은 순간이다.

 

 

 

 

                                         사진/김승범


하루하루 이슬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하도 나직하여 한참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이슬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은 마음 위로 이슬방울 하나 슬쩍 맺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들었던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나도 미끄럼을 타고 싶지만, 그러면 꿈이 깰까 봐.
-큰 소리에 익숙하다면, 당신은 저를 모르실 거예요.
-잠깐 제 안에 머물렀을 뿐, 빛은 제 것이 아닙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보물이 아닙니다. 저를 보세요.
-늘 드리는 기도 하나, 나를 지나간 빛이 더렵혀지지 않기를.
-저를 잊으세요, 그것이 저를 고맙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제 귀에 또렷했던 것은, 오히려 낮은 목소리였습니다.
-때가 되면 모두가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바닥까지 마음이 가라앉는 날엔, 가장 깊은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렇게 썼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습니다. 깨어지는 순간도요.


내일은 무엇을 써야 할지, 굳이 고민을 하지 않는다. 편하게 잠에 들며 들려줄 말을 기대한다. 이슬 맺히듯 들려주는 말이 있다면 옮겨 적으면 된다. 곧 다가올 추위, 이슬도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김승범

 

 

귀와 눈이 밝질 못한데도 이슬 묵상을 이어온 것처럼, 누군가 짤막한 묵상을 이어가면 어떨까 싶다. 곧 내릴 눈에 대해서도 좋겠고, 겨울나무에 대해서도 좋겠고,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게 빛날 겨울밤 푸른 별도 좋겠고, 어둠은 물론 눅눅함까지를 지우는 촛불도 좋겠고, 사랑에 대해서도 좋겠고, 얼마든지 눈여겨 바라보고 귀 기울일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덩달아 사물과 자연에 눈을 뜨도록,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누군가가 들려주는 나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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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방 한 칸

  • '정리'?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잘 정리해야 하는데...
    생각의 정리!
    사막에 있다면 물이 더 중요하고...
    병원에 있다면 빨리 낫는게 더 중요한데...

    애써~ 사막과 병원으로 가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1.18 12:45
  • 목사님 저번 글에 꽃 정보가 여기에
    https://images.app.goo.gl/pnNAvwR5zhfrCkmS7

    이진구 2019.11.18 13:10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15)

 

그래야 방 한 칸

 

모처럼 다른 일정이 없는 월요일, 목양실로 나왔다. 평소에도 조용한 예배당이 월요일이라 그런지 더욱 조용했다. 책상 옆 한쪽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있다. 공문과 신문과 잡지, 이런저런 자료와 보고서도 있다. 하루에도 여러 편 우편물이 전해지고, 교회 일과 관련한 자료와 보고서 등도 전해진다. 때마다 중요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덜 중요하다 싶은 것들을 쌓아두기 시작했는데, 그 높이가 어느새 제법이었다. 그때그때 분류를 하여 정리를 해두면 편할 것을 그렇지 못했다. 정리를 잘 못하는 성격도 컸거니와, 연일 이어지는 심방 등 바쁜 일정을 핑계로 쌓아 두기만 했었다.

 

 

 

그냥 일을 하는 것이 단조롭다 싶어 음악을 틀었다. 주로 클래식을 선물처럼 듣는다. 한가한 마음으로 음악을 듣는 일도 오랜만이지 싶다. 한 움큼씩 자료를 들고 와서 분류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정했다. 자료를 살핀 뒤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했다. 버릴 것은 왼쪽에 남길 것은 오른쪽에 쌓아두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 버릴 것이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 버릴 것을 챙겨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을 마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을 모두 마치고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러고 보면 쌓아두고 있었던 것은 자료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뭔가를 처리하지 못한 미진한 마음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었다. 한꺼번에 정리를 해보니 내게 부여된 일과 감당해야 할 의무가 적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교회 밖에서건 주어진 일들이 적지 않다. 크고 작은 다양한 요구들이 있다. 어떤 것은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것은 조정해야 하고, 어떤 것은 거절해야 한다. 어떤 일은 맡겨야 하고, 어떤 일은 챙겨야 한다. 그 경계가 불분명할 때도 있다. 하루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그런 일들 속에서 지나간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복잡하게 엉겨 마음이 어수선하다 해도 결국 그 모든 것들은 내 방 한 칸을 채우는 것들이었다.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하고, 벅차게 여겨지기도 하고, 일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겨우 방 한 칸에서 일어나는 작고 미미한 일들이었다. 반나절 정도 집중하면 대충 정리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내게 주어진 일이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양 부풀리거나 수선을 피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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