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9)

 

어쩌면

 

강원도 영월의 한적한 시골길, 차를 운전하며 가는데 저 앞에 길을 건너는 검은 물체가 보인다. 뭘까 싶었다. 검은 비닐봉지라 하기에는 길을 곧장 건너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차가 검은 물체와 가까워졌는데, 검은 고양이였다. 차가 온다고 서두르는 법도 없이 게으름을 떨듯 느긋하게 길을 건넌 것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길을 건넌 고양이가 길가에서 운전하는 나를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통 검은색 사이로 뭔가 서늘한 섬광이 전해졌다.


 

 

 


조금 더 차를 달렸을 때, 도로 한 가운데 놓여있는 물체가 있었다. 속도를 줄여 물체를 피하며 보니 죽은 고양이였다. 로드킬을 당했지 싶었다.

어쩌면 방금 전 도로 위를 천천히 건너간 고양이는 도로 위에서 죽은 고양이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그리도 천천히 걸음을 옮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지금 차를 몰고 지나가는 저 이가 혹시 고양이를 죽게 만든 것은 아닌지 노려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떨어지지 않는 듯 걸음을 옮겼던 걸음과, 노려보듯 바라보던 눈길이 이해가 되었다. 고양이의 걸음과 눈빛은 다른 고양이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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띳집과 나물국

  • 달리기를 하고 난 후에는 모든 음식들이 단맛이 납니다. 또한 배고픔에 허겁지겁 먹게 되며 맛있게 느껴집니다. 성정이 안정된다는 것은 어쩌면 달리기처럼 매일 단련해야 하지 않을까 봅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14 09:08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8)



띳집과 나물국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는 책 <명심보감>에 눈이 간다. 책을 꺼내 전에 밑줄 친 곳을 읽다보니,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다.


“마음이 편안하면 띳집도 안온하고, 성정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心安茅屋穩(심안모옥온)이요, 性定菜羹香(성정채갱향)이니라.


‘모옥’(茅屋)할 때의 ‘모’(茅)는 여러해살이풀을 말한다. ‘띳집’이란 띠라는 풀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누추(陋醜)한 거처(居處)를 말한다. 초라한 초가삼간에 누워도 마음이 편안하면 안온함을, 편안함과 따뜻함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채갱’(菜羹)은 나물국을 말한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없이 집 주변의 나물을 뜯어 국을 끓여도 성정이 안정되면 그 국이 향기롭다는 뜻이다.


길지 않은 글을 한 자 한 자 읽으니 띳집에 든 것처럼, 쥐코밥상 나물국 앞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고 숨이 고르다. 시절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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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김기석의 새로봄(189)

 

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할렐루야. 내가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모두 깊이 연구하는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 그 하신 기이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다(시편 111:1-4).

 

적대감에 가득 찬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달픈 일이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넋을 놓고 걷다가 느닷없는 크랙슨 소리에 놀라 질겁을 하듯이 언제 봉변을 당할지 몰라 우리는 전전긍긍하며 산다. 얼굴빛 환한 사람 만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다. 함석헌 선생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탄식하듯 말한다.

 

“영웅심에 들뜬 청년/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실망한 얼굴,/병에 눌린 얼굴,/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얼굴> 중에서).

 

참 아름다운 얼굴을 만나야 삶이 바로 선다. 히브리의 시인은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정직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샤르yashar’는 ‘곧다’, ‘옳다’, ‘똑바로 서다’라는 뜻으로 두루 쓰인다. 정직한 이들은 바로 선 이들이다. 내면에 기둥 하나가 들어선 이들이라는 말이다. 기둥이 바로 서면 그 위에 어지간한 무게가 얹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이 그러하다. 김흥호 목사님이 ‘믿음’을 ‘밑힘’이라 해석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아주 길쭉하고 홀쭉한 인물상을 많이 만들었다. 불안과 고독과 취약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궁핍한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물들의 눈빛은 형형하다. 마치 자기 운명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대개 직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큼성큼 걷는 그 인물들은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외롭고 고달프지만 불멸을 지향하는 사람의 존엄함을 본다. 직립한 사람은 아름답다.

 

시인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의 모임에 속한 즐거움이 크다고 고백한다. 그 모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꿈을 간직한 채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크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은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눌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시편 111:3).

 

장엄함에 대한 인식을 잃을 때 영혼은 남루해지고 삶은 왜소해진다. 장엄함 앞에 설 때 인간은 겸손해지고 심성은 확장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그의 처소에는 권능과 즐거움이 있다”(역대상 16:27). 주님 앞에 머물 때 푸석푸석하던 삶이 단단해진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밀려드는 일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우리는 떠밀려 가듯 시간 속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시선, 적대적인 시선을 만날 때마다 우리 가슴에는 퍼런 멍이 들곤 합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장엄한 위엄 앞에 서겠습니다. 내면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 하나 세우고 살겠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삶의 꿈을 나눌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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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길수록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7)

 

걸음을 옮길수록

 

오늘 새벽기도예배에서 나눈 본문은 마가복음 12장 1~12절이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포도원 비유였다.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의 걸음과 말과 태도는 점점 십자가에 가까워진다. 포도원 비유만 해도 그렇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것이 자신들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십자가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부터 돌아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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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빛

  • 사진에 있는 문구가 한글이지요.. 러시아 사람이 쓴 글입니까? 이것이 어디에 있는 거에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12 08:41
  • 사진은 제가 올리는 것이 아니어서 모르겠네요.
    저는 원고만 쓴답니다.

    한희철 2019.10.12 19:3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6)

 

 겸손의 빛

 

 

 

 

 

“너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거나 돌아서 있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없이 있을 수는 없다.”

 

한 러시아인이 한 말이라고 한다. 그는 왜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일까? 돌아보면 누구의 가슴 속에나 있는, 너무도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이 말을 내가 했다고, 이렇게 멋진 생각을 내가 했다고 이름을 밝히는 대신 무명으로 남아 그가 한 말은 또 하나의 빛을 발한다. 말의 의미는 물론 이름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드러내는 겸손의 빛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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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찬란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울을 일그러뜨려야 만 했을까?

다윗을 찬란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울을 일그러뜨려야 만 했을까?

 

 

사울은 오랫동안 잊혔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과 생애를 대충 아는 사람에게조차 잊혀왔다. 반면 다윗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추앙받아왔다. 무엇이 사울을 잊힌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다윗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추앙받아왔을까? 우리가 갖고 있는 사울의 초상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반면 다윗은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다. 누가 사울을 이토록 일그러뜨렸을까? 무엇이 다윗을 이처럼 화려하게 꾸몄을까?

 

 

 

사울은 이스라엘의 사사들이 다스렸던 지파공동체시대에서 왕이 통치했던 군주제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첫 왕이었다. 당시 고대 중동지역의 거대 문화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물론이고 가나안의 작은 종족들도 모두 왕이 다스렸다. 이스라엘에도 왕정이 낯선 제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오랜 전통의 야훼 유일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이나 인간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이 전통의 대변자인 사무엘에게 백성들은 왕을 달라고 요구했다. 야훼가 마지못해 이 요구를 들어준 데는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 안정적인 리더십이 필수적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함께 세금과 직업군대 등 관료제를 유지할만한 여력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과 다윗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후대의 역사는 사울을 일그러뜨리는 값을 지불하고 다윗을 찬란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윗을 그렇게 미화하기 위해서는 사울을 일그러뜨려야 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능가하는 인간적인 매력을 갖췄다고 볼 수는 없다. 사울은 사울대로, 다윗은 다윗대로 매력과 약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약점이 부각되었고 다윗은 매력이 두드러지게 강조됐다.

 

우리가 <사무엘서>에서 만나는 사울과 다윗은 신명기 역사가로 짐작되는 설화자에 의해 평가된 사울과 다윗이다. <사무엘서>는 이미 사울과 다윗에 대한 평전인 셈이다. 이 책은 이 평전을 평가하는 책이다. 곧 설화자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평가하는 책으로서 ‘평전에 대한 평전’인 셈이다. 이 책은 다윗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평가를 교정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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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명

  • 공감합니다. 저도 제 과녁이 아닌데도, 불쑥 불쑥 참지 못하고 쏘고 만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적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11 09:16
  • 빗나간 화살,
    그것이 죄의 의미라 하더군요.

    한희철 2019.10.11 21:36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5)

 

어떤 소명

 

과녁이 아닌데도, 우리 가슴엔 수많은 화살들이 박혀 있다. 누군가의 말, 원치 않았던 사람, 피할 수 없었던 일, 때로는 피를 철철 흘리기도 했고, 겨우 아물던 상처가 덧나기도 했다. 상처투성이의 모습은 과녁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돌아보면 화살이 어디 내 가슴에만 박힌 것일까? 함부로 쏘아댄 화살이 내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미숙함으로 성급함으로 쏜 내 화살에 맞은 가슴이 왜 없을까? 나로 인해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이가 왜 없을까?

 

서로의 화살을 뽑아줄 일이다. 떨리는 손으로 깊이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눈물 젖은 손으로 약을 바를 일이다. 돌에 퍼렇게 이끼가 낀 신학교 교문만이 아니다. 녹이 슨 봉쇄 수도원의 철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소명 앞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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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김기석의 새로봄(188)

 

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먹는 고기일 따름이다. 그러니 나 주가 어찌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느냐?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허물을 벌하여서, 그들을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겠다.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 유다 백성이 견고한 성읍들을 많이 세웠으나, 내가 불을 지르겠다. 궁궐들과 성읍들이 모두 불에 탈 것이다(호세아 8:11-14).

 

예언자들의 말은 거칠다. 사람들의 안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폭풍이다. 느른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소음처럼 들린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그렇기에 예언자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은커녕 박해를 받기 일쑤이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이다. 가까운 이들조차 그들에게 등을 돌릴 때가 많으니 말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예레미야 20:8b)라고 탄식했다. 탄식하면서도 그 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억센 힘에 사로잡힌 자들이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들이 만든 세상에 분노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언명령은 기각되었다. 사람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엄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호세아 8:7).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데 그럴 리 없다고 믿는다. 신실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자의적 신앙일 뿐이다. 믿음이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일이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등지는 이들이 많다. 이 전도된 현실이 한국교회 개신교회의 자화상이다.

 

예언자의 말은 가차 없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호세아 8:11). 두려운 말씀이다. 교회가 늘어날수록 죄가 늘어난다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생각이 없다면 번다한 예배가 무슨 소용인가?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드리고, 더러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하게 보일 수도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호세아 8:14a).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이 죄가 아니던가. 다 잊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두렵고 떨림으로 기억할 때 죄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지 않는다.

 

*기도

 

하나님, 도심의 밤거리 어디에서나 붉은색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십자가를 보며 평안과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공동묘지를 떠올리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단이 늘어날수록 죄도 늘어난다는 말씀이 예리한 통증이 되어 우리를 찌릅니다.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꿈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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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을 깎으며

  • 100프로 공감합니다.맞네요. 요즘은 사람들이 뚱뚱해져서 발톱을 잘 못깍는 사람들이 많은데, 발톱 깍는 자세 또한 특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10 08:48
  • '하물며' 말이지요.

    한희철 2019.10.11 07:3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4)

 

 손톱을 깎으며

 

믿음이나 인격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만, 시간이 지나며 저절로 자라는 것들은 의외의 것들이다. 머리카락과 수염, 손톱이 그렇다. 잠시 잊고 있다 보면 어느새 자란다.

 

 

 

 

 

대부분의 경우 손톱은 책상에 앉아서 깎게 된다. 손톱이 자란 것을 우연히 보고는 서랍에 있는 손톱깎이를 찾아 손톱을 깎는다. 손톱에 무슨 생명이 있을까 싶은데, 그렇지가 않다. 잘린 손톱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튀어 오른다. 다시는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날아간 손톱은 어딘가로 숨는다. 원고를 쓰는 동안 자판을 눈여겨 봐 둔 것인지 키보드 자판 사이로 숨기도 한다. 그러면 자판을 거꾸로 들고 흔들어대어 손톱을 떨어뜨려야 한다.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하고선 다른 선택을 한다. 손톱을 깎을 때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앉는다. 그리고는 책상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가져온다. 쓰레기통을 거부하는 손톱들도 있지만 대개는 통 속으로 들어간다. 도망친 손톱을 찾아내는 것도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책상 위에서 깎을 때보다는 훨씬 편하다.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일에 맞는 자리와 자세가 따로 있다. 하물며 손톱을 깎을 때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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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만 살아계신 하나님

  • 멀지 않다= 가깝다=이르지 않았다 !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 산 정상에 올라가기 500m전 ~ 내려오는 사람에게 얼마나 남았나요? 다 왔어요.! 하지만, 그 500m가 아주 멀게 느껴지는 듯!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09 11:46
  • 예수님 말씀이 오늘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극복해야 할 거리가 남아 있는.

    한희철 2019.10.09 19:13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3)

 

일요일에만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님께 나아와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은 한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습니다.”(마가복음 12:33)라고 새긴다.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34절)고 하며 그의 대답을 인정하신다.

 

 

 

 

 

새벽기도회 시간, 그 말씀을 나누다가 하일의 시 한 구절을 소개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의 실천 없이 번제물과 기타 제물을 드리는 종교적 행위에 머물러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낫지 않는 상처처럼 마음에 남아 있는 구절이었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일요일에만 살아계신 하나님’

 

어찌 하나님이 일요일이라는 빨간 글씨 안에 갇혀 계실까,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필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마치 하나님이 일요일에만 살아계신 것처럼, 평일에는 잠을 자거나 부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예수님 말씀이 절묘하다. ‘멀지 않다’는 것은 ‘가깝다’는 뜻, 하지만 아무리 가까워도 가깝다는 것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교사의 생각과 대답이 매우 훌륭하다고 해도 그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 주변을 서성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문득 아침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던 것은 단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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