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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4

이팝나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0) 이팝나무 언제부터 저리 많았나 싶게 요즘 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 중 흔하게 보게 되는 것이 이팝나무다. 눈이 부실 만큼 나무 가득 하얀 꽃을 피워낸 모습을 보면, 이팝나무만 골라 폭설이 내린 듯 눈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인다. 꽃을 볼 때면 슬쩍 군침이 돌기도 하는 것은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쑥버무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뜯어온 쑥 위에 쌀가루를 뿌려 만든 쑥버무리, 이팝나무엔 하얀 쌀가루와 푸른 쑥이 그럴 듯이 어울린다. 하지만 이팝나무 꽃을 바라보는 종국엔 괜스레 눈물겹다. 저 하얀 꽃을 바라보며 하얀 이밥을 떠올렸던 배고프던 시절을 생각하면. 먹을 게 넘쳐나 이팝나무를 바라보면서도 이팝나무의 유래를 모르는 오늘을 생각하면. 2019. 5. 21.
어부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9) 어부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농암종택을 찾기 전까지는 농암을 몰랐다. ‘어부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내게 떠올랐던 것은 윤선도의 어부가뿐이었다. 자료를 대하니 농암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2019. 5. 21.
견뎌야 하는 무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8) 견뎌야 하는 무게 창문 밖으로 건물 하나를 짓는 모습을 여러 달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모든 재료와 모든 과정들이 모여 집 한 채가 세워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 토요일인 엊그제도 아침부터 작업이 한창이었다. 2층에서 3층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키가 장대인 크레인이 서서 온갖 재료들을 일하는 곳까지 올려준다. 저 모든 재료들을 사람이 등짐으로 옮기자면 하세월일 텐데, 지금은 기계가 척척 감당한다. 오늘 올리는 짐들의 대부분은 철근이다. 크레인은 키만 큰 것이 아니어서 힘도 세다. 철근 한 다발을 들어 올리면서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 도면을 든 이가 위로 올라온 철근이 놓일 자리를 지정해 주면, 다른 이들은 열심히 철근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야말로 일사.. 2019. 5. 19.
신선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7) 신선대 한국 산에 반한 규영이와 함께 도봉산 포대능선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도봉산 초입을 찾아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봉산은 손에 꼽을 만큼 우람하고 멋진 산이었다. 특히나 와이(Y)계곡은 험하기도 하고 위태하기도 하여 스릴과 함께 자유로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지나온 길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지 않겠는가. 정점을 찍듯 마침내 오른 봉우리가 신선대였다. 탁 터진 사방과 시원한 바람, 산을 오르며 힘들었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보상 받는 느낌이었다. 신선대 바로 앞에 솟아 있는 봉우리도 아름다웠다. 층층 쌓인 바위들이 또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빼어난 경치에 반해 이 땅을 찾은 하늘의 천사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가.. 2019. 5. 19.
은퇴(隱退)와 염퇴(恬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6) 은퇴(隱退)와 염퇴(恬退) 은퇴(隱退)는 ‘숨길 은’(隱)과 ‘물러날 퇴’(退)로 된 말이다.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낸다는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물러나 숨는 것, 혹은 숨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 은퇴였던 것이다. 물러난 뒤에도 숨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포곡은사처럼 어설프게 나섬으로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경우들이 적지 않으니 물러나 숨는다는 의미는 얼마든지 새겨둘 만한 것이었다. 농암 이현보를 통해 알게 된 말 중에 ‘염퇴’(恬退)가 있다. 염퇴란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든지 출세의 길이 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등지고 고향을 찾은 농암에게 어울렸던 말이 ‘염퇴’였던 것이다. 염퇴의 길을 나서며.. 2019. 5. 18.
맞은편에서 보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5) 맞은편에서 보면 경북북지방 연합성회에 다녀왔다. 안동과 영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경북북지방은 4개 시(市)와 6개 군(郡)으로 이루어진 지방이었다. 한 개 도시에도 여러 개의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 도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 지방의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가는데 차로 3시간이 걸린다니, 29개 교회가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집회는 영주에 있는 영주성민교회에서 열렸는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두 시간 가량을 오가는 교회도 있었다. 두 시간 가령을 달려와 말씀을 듣고 다시 밤길 두 시간을 달려 돌아가야 하니 지극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싶었다. 대부분은 오지에 있는 작은 교회들, 모두가 또 하나의 단강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그랬을.. 2019. 5. 17.
창세기 22장을 읽다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5) 어느 날의 기도 -창세기 22장을 읽다가 아침 일찍 길을 나섰을 뿐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의견을 물어 핑계거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선물로 주신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 산산이 조각난 심장인 양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어 지고는 일러주신 곳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습니다. 걸음마다 나는 죽었고, 이미 나는 제물이었습니다. 2019. 5. 16.
뼛속까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4) 뼛속까지 ‘뼛속까지’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뼈의 내강(內腔)이나 해면질(海綿質)의 소강(小腔)을 채우고 있는 세포와 혈관이 풍부한 연한 조직.’ 병원 응급실이나 수술실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뼛속까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책 제목 중에는 는 것도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뼛속까지 높아지는데 관심이 있었다. 두 제자는 영광의 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 당당하고 은밀하게 요구하기도 하고, 자기들 중에서 누가 높은지를 두고 다투기도 한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도 말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당할 고난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무슨 훌륭한 질문인 .. 2019. 5. 15.
‘우리 모두’와 ‘저와 여러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4) ‘우리 모두’와 ‘저와 여러분’ 언젠가 몇 몇 목회자들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였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이 흔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즐겁고 유익하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아들 목사를 둔 원로 목사님이 당신이 들은 아들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다른 건 몰라도 설교 중에 ‘우리 모두에게’라고 표현하는 것은 좋다고 여겨져요.” 설교자가 설교 중에 사용하는 용어, 특히 인칭대명사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설교자가 갖는 태도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 모두’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설교자가 회중과 자기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2019.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