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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by 한종호 2017. 8. 22.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4)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펀치볼은 그 옛날 운석이 떨어져 생겼다는 설과 차별침식분지라는 설이 양분합니다. 전 노아의 홍수 지구 재편 때 만들어진 하나님 작품이라고 주장합니다. 해질 무렵이면 그분이 빚은 작품을 만난다는 기대도 격려가 될 겁니다.”


함광복 장로님이 그렇게 표현했던 펀치볼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처음부터 긴 팔 옷을 입고 나선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조금만 가면 돌산령터널이 나오는데 돌산령터널 안은 한 여름에도 추우니 꼭 긴팔 옷을 챙겨 입으라고, 전날 보건지소에서 만난 마을분이 일러준 말을 너무 고지식하게 따른 결과였다. 바람막이 긴팔 옷은 이내 땀에 젖고 말았는데 그러면서도 터널이 금방 나타나겠지 싶어 옷을 벗지 않은 채 걸음을 이어갔으니, 역시 모르면 모르는 만큼 고생을 하는 것이었다.


금방 나온다고 했던 터널은 한참을 걸었는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먼 길을 걸어서야 터널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터널로 향하는 길 바닥에는 파란색으로 그려진 자전거 길이 있었는데 자전거 길을 따라 나란히 달리는 것이 있었다. 철조망이었다. 저것이 악보를 적는 오선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철조망에는 음표 대신 ‘지뢰’라는 경고판이 같은 음으로 매달려 있었다. 파란색 자전거길 표지와 붉은색 지뢰 표지,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그렇게도 평화와 위험이 가까이 공존하고 있었다.


해안에서 양구로 가는 길목,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일러주듯 돌산령터널은 참으로 길었다.


돌산령터널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도솔산을 옆으로 끼고 해안과 양구를 잇는 터널이었다. 돌산령터널과 도솔산전투 또한 파란색 자전거길 표지와 붉은색 지뢰 표지만큼이나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돌산령터널 입구까지 오느라 땀은 가득하고 숨은 벅찼지만 곧장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길을 걸으며 정한 원칙 중의 하나는 고개를 만나면 아무리 힘들어도 고개를 넘은 뒤에 쉬자는 것이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면 다시 일어나 걸을 때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었다.


터널 안엔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가장자리로 사람이 걸어갈 만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일반도로에서 그랬듯이 터널 안에서조차 사람이 걸어갈 길이 따로 없으면 얼마나 위험할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도로보다 조금 높은 곳에 일정한 크기의 콘크리트 덮개가 이어져 있었다. 덮개는 걸을 때마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차 한 대만 지나가도 터널 안에 엄청난 공명이 생겨 마치 거대한 터빈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괴롭기가 여간 아니었지만, 그래도 터널 안에 보행자 통로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 여겨졌다.


돌산령터널의 길이는 2995m, 꼭 5m 모자라는 3km였다. 말이 3km지 터널 속을 그만큼 걸어간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반대편에 하얀 작은 점 하나가 보이는데 출구지 싶은 그 희미한 점은 가도 가도 여전히 같은 크기를 유지하며 가까이 다가오지를 않았다. 어둠의 터널을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지를 돌산령터널은 터널 속을 걷는 내내 생각하게 했다.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준 정장로님.


지루하다 싶을 만큼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또 걸으니 어느 샌가 저 끝으로 하얀 빛의 동그라미가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눈을 의심할 만한 일이 생긴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터널 맞은편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역광이기도 했지만 혹시 내가 환영을 본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은 그동안 길을 걸으며 길을 걷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나처럼 길을 걷는 사람이 있구나, 그 사람을 터널 안에서 만나다니, 기가 막힌 인연이다 싶어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인사라도 나눠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터널 안에서 큰 목소리가 울렸다.


“목사님…!”


순간 얼어붙는 줄 알았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둠 속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이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니,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 양 옆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는 맞은 편 사람은 저벅저벅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야 나를 향해 걸어온 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성지교회 정 장로님이었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 장로님은 빼앗듯이 내가 메고 있는 배낭을 벗겨 자신이 메고는 통로 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랬을까,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장로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싶었다. 엉엉 울고 싶었다. 두 눈이 금방 흐려졌다.


터널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터널 밖에는 장로님의 부인 김 권사님이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님 내외는 새벽 일찍 길을 떠나 내가 걷고 있겠다 싶은 길을 짐작하며 역(逆)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제법 먼 길을 왔다 싶은데도 내 모습이 보이질 않자 펀치볼 입구인 돌산령터널까지만 가보고, 그래도 보이질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했단다. 그런 마음으로 돌산령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는데 누군가 터널 속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는 것이다. 걷는 모습이 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하긴 터널까지 오느라 힘을 소진한 상태였으니 걸음이 힘찼을 리는 없을 일이었다. 내 모습을 확인한 두 분은 터널 끝으로 나가 차를 유턴하여 반대편으로 온 것이었고, 길가에 차를 세워둔 뒤 장로님이 터널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반갑고 고마운 만남이 세상에 어디 흔할까? 일어난 일이 비현실적이다 싶어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권사님은 차에 챙겨온 이것저것 먹을 것을 꺼내주셨고, 우리는 길가 바닥에 앉아 드문 만남이 주는 은총을 마음껏 누렸다.


길을 걷다 쓰러지면 안 된다고, 앞서간 권사님이 정한 식당은 토종닭 백숙집이었다.


그날 장로님은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같이 걸었다. 권사님은 우리보다 앞서가며 식당을 예약하는 등 선도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차를 운전하는 권사님이 여전히 목사의 배낭을 대신 메고서 걷는 장로님께 배낭을 차에 싣자고 했다. 차 뒷자리에 싣고 빈 몸으로 걸으면 훨씬 편하게 길을 걸을 수 있으니 나도 그러자고 했는데, 장로님은 배낭 안에 큰 보물이라도 있는 듯 고집을 부렸다. 지지 않아도 될 배낭을 종일 메고서 걸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런 모습이 보물이었다.


그날 나는 장로님을 통해 짐을 함께 진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짐이 무엇인지 짐을 어떻게 벗을 수 있는지 말로 하는 것도 아니었고, 짐을 진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혹은 함께 편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 그러느라 함께 땀을 흘리는 것, 그것밖엔 없었다.


길고 지리한 돌산령터널, 내 배낭을 대신 메고 앞서 걸어가는 장로님의 뒤를 따라 터널을 빠져나올 때, 내가 빠져나온 것은 돌산령터널만은 아니지 싶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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