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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2)

by 한종호 2017. 4. 26.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5)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2)

호세아 11:8-9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연구는 96%가 같다고 하고 다른 연구는 98.5%가 같다고 하는데 이 차이가 과학자들에게는 의미가 클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유전자는 어느 정도나 같을까요? 뜬금없는 생각이지요? 단순히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화낼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 아닙니까? 물론 하느님에게 유전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느님과 사람이 ‘어떤’ 성격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인간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표현해왔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외모까지 인간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이 오른팔을 높이 들거나 휘둘러서 구해주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오른팔을 갖고 계실까요? 그럼 왼팔은 어떨까요?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왼팔 얘기는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사람처럼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인간적 사고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도 꿈을 꾸는지, 자의식이 있는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죽으리란 사실을 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 반가워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강아지를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개는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지만 고양이에게는 그게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지요. 서로의 감정을 오해해서 으르렁거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개가 반가워서 꼬리를 흔든다는 것도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따름이지 정말 그런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느님이 정의롭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분노한다거나 용서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적으로 사고하고 인간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늘에서 땅이 먼 것처럼 하느님과 사람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말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도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는 생각이고 표현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하는 생각도 우리가 인간임을 전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사고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고하고 표현할 때 인간적인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와 비유, 상징을 하느님에게 적용하면 빛이 바래고 말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결혼한 부부관계


지난번에 구약성서에서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저지른 잘못을 왜곡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또 할 수 있으면 상황을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으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이므로 용서받기 위해 ‘회개’가 강조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는 이와는 성격이 다른 용서가 있습니다. 이런 용서를 잘 보여주는 책이 호세아서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왕이나 재판관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거나 재판관으로부터 판결을 받아야 하는 피고의 자리에 놓입니다. 대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한 부부관계로 표현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설화자는 그녀를 ‘음란한 여자’라고 표현했는데 호세아가 그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미 그녀가 음란했는지 아닌지, 호세아는 그런 여자인지 알고 결혼했는지 아닌지, 설화자가 그녀의 행실을 보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그렇게 규정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좌우간 그녀는 호세아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음란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여자답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그런 고멜을 다시 불러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람이 나서 집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오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흔치 않은데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더욱이 그런 행위는 하느님이 내린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바람을 피워서 집을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호세아에게 그렇게 명령했으니 하느님은 당신의 계명을 스스로 어긴 셈입니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비유했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관계는 나이 많은 남자가 아직 결혼하기에는 어린 소녀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고 돌보다가 때가 되어 결혼한 부부관계와 비슷합니다. 남자는 성숙한 어른인데 여자는 어린 소녀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9:10; 11:1-4).


사랑을 배신당한 하느님


이렇듯 하느님은 미래의 배우자 이스라엘을 애지중지 돌보고 키웠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내(하느님)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었다.”(2:8)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신 바알의 축제일만 되면 그에게 향을 피우고 야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을 내쳤습니까? 그들을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 살 때로부터 주 너희의 하느님 아니냐? 그 때에 너희가 아는 하느님은 나밖에 없고 나 말고는 다른 구원자가 없었다.”(13:4-5)라면서 이스라엘을 설득합니다. 아니, 이것은 ‘설득’이 아니라 ‘애걸’에 가깝습니다. 바람나서 가출한 아내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이 애결복걸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왜, 뭐가 아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그랬습니다. 이 점은 조건부 용서를 뛰어넘습니다. 조건적 용서에서는 용서하는 편이 용서를 구하는 편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마련인데 이 경우에는 입장이 뒤바뀌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사자처럼 되고 이제는 표범처럼 되어서 길목을 지키겠다. 새끼 빼앗긴 암곰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그들을 뜯어먹을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찢어 먹을 것이다(13:6-8).


살벌하고 폭력적이며 끔찍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이처럼 분노에 찬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정말 하느님은 굶주린 사자나 표범이 되고 새끼 잃은 암곰이 되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당신 백성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작정인 걸까요?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당신 백성을 뜯어먹고 들짐승더러 나머지를 남김없이 찢어먹게 하려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배신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하느님이 하신 다음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느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11:8-9).


우리는 여기서 자기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 이스라엘을 내치지 못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 그래서 애간장 끊어지는 아픔을 겪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의 결혼생황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랑은 고귀한 것입니다. 특히 부부 간의 사랑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고 고결합니다. 따라서 이 고귀한 사랑이 배반당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환멸스럽고 사무치게 가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과 호세아는 똑같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듯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여기서 비롯된 분노의 심정을 하느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그는 이제 나의 아내가 아니며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색욕을 없애고 그의 젖가슴에서 음행의 자취를 지우라고 하여라(2:2)!


호세아는 고멜과의 결혼과 그녀의 배신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참담함을, 그 환멸과 아픔을 호세아도 경험함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배신당한 하느님의 아픔에 공감하고 동정(compassion)하게 된 겁니다. 호세아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이 하느님의 가슴 속에서 벌어지는 혼돈과 분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릴 수 없는 애정을 비춰주는 거울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멜은 회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이 조건부 용서입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비로소 실현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고멜은 어땠습니까? 고멜은 용서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까?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잘못을 회개했을 리 없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스스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용서의 조건들 중에서 한 가지도 충족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호세아는 이런 고멜을 두고 그녀를 용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갑론을박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사자가 되고 표범이 되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했다가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너를 버리려 해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당사자 고멜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런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용서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 곧 가해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역시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만 푼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역시 해결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음을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합니다. 성서에서 죄의 용서를 말할 때 대개는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곧 ‘내가 너를 용서한다.’(I forgive you)가 아니라 ‘네가 용서를 받았다.’(You are forgiven) 또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Your sin is forgiven)라는 식으로 씁니다. 또한 주어가 하느님인 경우에는 하느님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수동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하느님에 의해서’(by God)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용서의 주체가 하느님이란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역시 수동형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수동형의 경우는 하느님이 생략된 일반적 수동형의 경우와 의미가 좀 다릅니다. 다음번엔 둘이 어떻게 다른지, 왜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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