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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안철수와 역사의식

by 한종호 2017. 4. 18.
안철수와 역사의식

만일 유대교에서 이들의 해방절인 유월절을 과거 회고적이라고 지우자고 하면 어찌 될까? 당연히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일이 민주당과 통합하는 안철수의 새정치연합 쪽에서 일어났다. 4·19와, 5·18을 비롯해서 6·15와 10·4선언을 과거 회고적인데다가 소모적인 이념논쟁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정강정책에서 삭제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당장 민주당 쪽은 강하게 반발했고,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역사에는 중대한 전환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전환점은 민족 구성원 모두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지속적으로 되새기면서 그 정신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토대로 앞으로 나갈 방향을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와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과거사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사실 이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과거사로 멈추지 않고 지금의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현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우리에게 1910년의 일본에 의한 합병과 1919년의 3·1운동에 대해 과거 회고적인 일이니 자꾸 되새기지 말고, 외교적 껄끄러움이 있으니 대충 잊고 미래를 지향하며 나가자고 한다면, 그 후안무치에 우리는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특별히 민주당한테 6·15와 10·4는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이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향점을 일깨우는 기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정신을 가진 당과 통합한다면서 그 기둥을 송두리째 뽑자고 요구했으니 그것은 기본적인 역사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식을 접한 이들 상당수는 경악하고 있다. 여당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통합 야당의 출현에 기대를 걸고 있던 이들은,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일은 안철수와 그의 세력에게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통합 야당의 위력을 스스로 위축시키는 자충수가 되었다고 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 역사에 대한 냉철한 의식과 역사적 책임과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 쪽은 6·15와 10·4를 정강정책에서 삭제하자고 했다가 반발을 사자, 기껏 한다는 말이 7·4와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게 그렇게 둘러댄다고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있는가?

정강정책은 정당의 소신과 신념을 밝히는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그걸 형평성 논리를 대며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해 보겠다? 누가 이걸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며,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가? ‘새 정치’를 하겠다면서, 이처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등 부끄러운 역사의식의 부재를 날것으로 보여준다면 새 정치라는 말 자체는 우리 모두에게 재난이 될 뿐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를 썼고 희생된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삭제하자는 것은, 이들의 의식 속에는 역사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김한길, 안철수는 부랴부랴 심야회동을 통해 이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반영하기로 했다지만, 이미 드러난 의식의 공동(空洞)상태는 어찌할 것인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단지 먹고사는 문제로 격하시킴으로써 민족적 자존감과 역사의식을 폐기하려는 자세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한다. 오래전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살겠다는 믿음 하나로, 배고픔과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떠났다. 그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역사적 존엄성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우리를 배부른 돼지가 되려고 안달하는 존재로 취급하지 말라.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편집자 주/이 글은 2014년 3월 20일자 한겨레신문 [야! 한국사회]에 쓴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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