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검은 사람일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

속 검은 사람일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

 

 

따끔이 속에 빤질이, 빤질이 속에 털털이, 털털이 속에 얌얌이, 이게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따끔이, 빤질이, 털털이, 얌얌이, 각각의 의미도 짐작하기 쉽지 않은 터에 그것들이 서로의 속에 있다니 마치 말의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다.

 

정답은 밤이다. 캄캄한 밤이 아니라, 가을에 익는 밤(栗) 말이다. 밤을 먹기 위해서는 따끔따끔한 가시를 벗겨야 하고, 두껍고 빤들빤들한 겉껍질을 벗겨야 하며, 그 뒤에는 작은 털이 달린 껍질을 다시 벗겨야 하고, 맨 마지막으로는 떫은맛을 지닌 속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마침내 고소하고 오들오들한 밤을 얌얌 맛있게 먹을 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겉 다르고 속 다를 때가 있다. 아니,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참 드문 일이 되었다. 어디서고 가면극이 벌어지는 세상, 허전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양의 탈을 썼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이 있다. 겉은 그럴듯하지만 속에는 음흉한 생각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낚시 바늘을 보면 바늘 뒤편에 살짝 되꼬부라진 부분이 있다. 이른바 ‘미늘’인데 바로 그 미늘 때문에 고기는 걸려든다. 미늘 때문에 물고기는 바늘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된다. 겉으론 웃지만 뒤편에 미늘을 숨긴 채 다가오는 사람이야말로 ‘양의 탈을 썼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달과 별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가 그렇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떡을 팔고 장에서 다녀오는 엄마를 호랑이는 잡아먹는다. 떡 하나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결국 호랑이는 엄마를 잡아먹고 만다. 하나씩 하나씩 빼앗기는 것이 결국은 전부를 빼앗기는 길이라는 걸 호랑이를 통해 보게 된다.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외딴집에 남겨진 오누이마저 잡아먹기 위해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오누이를 찾아온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오누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호랑이는 자기 발에 분을 바르고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낸다.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어찌 분칠을 한 호랑이 발을 엄마의 손으로 알 수가 있었는지, 호랑이 목소리를 엄마의 목소리와 혼동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결국 오누이는 호랑이 앞에 문을 열어주고 만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오누이는 바로 우리들일 수 있다. 분칠을 한 호랑이 발을 엄마의 손으로 알고, 그럴듯한 호랑이 목소리를 엄마의 목소리로 알고 헛된 것 앞에 문을 여는 일은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우리의 속담 중에 ‘속 검은 사람일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는 속담이 있다. 검은 속과 화려한 비단옷이 대조를 이룬다. 속이 검으면 검을수록 그것을 가리려는 화려함은 더욱 화려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단옷을 입었다고 덕 있는 사람이라 당연히 생각해서도 안 되고, 허름한 옷 입었다고 당연한 듯 무시해서도 안 될 일이다. 비단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무조건 검은 속을 의심할 건 아니겠으나, 비단 옷 입고 비단 같은 말을 한다 하여서 무조건 믿을 일 또한 아닌 것이다.

 

비단옷을 입어 다른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느니 차라리 무명옷을 입고 무명옷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지만, 무엇보다 비단옷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겠다. 두껍게 바른 분으로 감추고 다가오는 날카로운 발톱을 행여나 엄마의 손으로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일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행여 비단옷을 입고 보는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느니, 무명옷을 입고 무명옷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레 그립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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