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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출간 책 서평

이런 종교라면 망하는 게 낫다!

by 한종호 2016. 3. 11.

이런 종교라면 망하는 게 낫다!



편집자 주/이 대담은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잡설》책에 실린 내용으로 ‘종교’를 테마로 다섯 분(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도법/조계종 화쟁위원장, 오강남/종교학자)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김민웅 종교의 언어문제인데요. 저는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교회 용어가 대단히 큰 문제라고 봅니다. 그 용어에 사람을 가두기 때문이에요. 종교 용어와 일상용어가 관련이 없다보니까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르게 사는 거죠. 예수는 철저히 일상의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씨 뿌리는 얘기, 고기 잡는 얘기 등등은 전혀 종교성을 발견할 수도, 종교적 언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예수의 언어는 일상의 삶을 끌어안은 데 반해서 제도화되고 역사화 된 종교의 용어는 자기의 독특한 지위로 다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 언어도 성벽이 되어서 하나의 기득권이 됩니다. 우리의 삶을 깊고, 높고, 넓게 만들어주려면 새로운 말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요.


오강남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 간의 대화입니다. 한스 큉은 《한스 큉의 이슬람: 역사 현재 미리》에서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 없고,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도 없다는 말을 했어요. 거기 한 마디 더 했더군요. 타종교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거죠. 종교 지도자라면 다른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갖춰야 되는 거예요. 잘못된 종교는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가르칩니다. 한스 큉이 세계 3대 종교 3부작을 썼잖아요. 그는 어떤 종교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 종교가 평화롭게 살아야 이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이 책을 썼어요.





종교적인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꿔야


김민웅 미국에서 목회할 때 돌아가신 박태준 전 총리가 저희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부인은 아주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이분이 개종을 하려니 너무 힘든 거예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심사가 복잡했던 거죠. 제가 그랬어요. “불교의 바다를 버리지 마시라. 그 좋은 것을 왜 버리시냐!” 그랬더니 그분 얼굴이 확 펴지더군요. 자기는 목사가 이렇게 얘기할 줄 상상을 못했다는 거예요.


오강남 요즘은 종교학자들 중에 멀티플 멤버십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크리스천 부디스트일 수도 있고, 부디스트 크리스천일 수도 있다는 거죠. 제일 잘 알려진 사람이 폴 니터인데 이 사람은 가톨릭 신앙에서 힌두교로 갔다가 불교로 돌아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힌두교인이 될 때 가톨릭을 버리지 않았고, 불교인이 되기 위해 가톨릭과 힌두교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트리플 멤버십이 아니라 멀티플 멤버십인 거죠.


김민웅 기독교 신학사도 그래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지고 성경을 읽었잖아요. 무신교적 철학과 결합한 신학들이었지요. 경교는 경교대로 유교라는 틀 속에서 기독교를 읽어 냈어요. 그리스 정교와 기독교는 거의 다른 것처럼 보이잖아요. 다양한 멤버십의 차원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몸과 근육과 영혼과 마음을 길러왔던 언어와 만나게 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오강남 한국에서는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 봐도 그 속에는 불교와 유교가 이미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개종이란 없고, 하나를 덧붙인다는 의미의 가종(加宗)이 있을 뿐이란 거죠. 종교사를 보면 종교는 독립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강처럼 섞인 거예요. 세계지도에서 강과 같은 것이 종교사인데 한국 기독교는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믿어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런 것부터 깨는 것이 종교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들이 없어지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기석 일상의 언어로 예수가 새로운 종교 얘기를 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 교수님 말씀처럼 학자들이 크리스천 부디스트든 크리스천 힌두이스트든 괜찮고, 그런 연구가 한편으로는 계속 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저는 신학자들에게 종교적인 언어를 가장 비종교적인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현장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스님들이 쓴 책은 일반인들이 많이 보는데 왜 목사가 쓴 책은 사람들이 왜 보지 않을까요. 어떤 분이 그랬더군요. 목사들의 글은 설교를 하는데 스님들의 글은 그냥 우리 얘기를 들어주고 포용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맞는지 틀린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꼭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상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자나 신학자는 번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합니다. 종교적인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자체가 종교 그 자체일 수는 없지만, 종교적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분명 종교 특권층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더라도 종교개혁 이전에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려던 위클리프나 얀 후스와 같은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성경이 민중의 손에 들려지고 성경 해석권이 민중의 손으로 들어가면 자기들의 특권이 훼손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마커스 보그란 신학자는 예수 운동을 해석학적 투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똑같은 텍스트를 놓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거죠. 해석학적 투쟁이 있어야 되는데 이 시대의 기독교에 국한해서 이야기 하자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같은 텍스트를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해석학적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석학적 투쟁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물들이 일상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줘야 됩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책임인데 그럴 번역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죠.


김민웅 멀티플 멤버십 얘기를 했지만 하나로 통하는 게 뭐냐면, 결국 일상의 언어로 들어가면 그 사람이 살아왔던 삶의 내용과 만나게 됩니다. 삶의 내용과 만나다 보면 정말 많은 요소들이 있잖아요. 산상수훈을 보면 기막힌 거예요. 거기엔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없어요. 마음 이야기가 가득 합니다. 그거 하나만 놓고 보면 다른 제도적 종교, 특히 불교와 충돌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헬라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의미를 일상의 언어로 펼쳐나가는 노력이 필요해요. 불교도 그렇게 해나가는 과정이 있으면 굉장히 많은 것이 오고 갈 수 있을 거예요.


도법 사람들이 성과 속으로 얘기하잖아요? 저는 부처님이 한 일이 현실 속에서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종교였던 바라문교는 상놈과 양반의 존재를 인정했어요. 바라문 계급과 천민 계급이 있었고, 이게 당시 종교의 진리였던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상놈이나 양반으로 태어나는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도둑놈도 되고 선인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성속이란 뭐냐? 부처님은 상놈과 양반이 있다고 가르친 바로 그 사고방식이 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반이 있고 상놈이 있는데 나는 상놈이라 못 났네”라고 생각하니 굴종적인 삶을 살게 되는 거잖아요. 그랬던 사람이 “야, 그런 것 없어. 본래 만인은 평등해. 중요한 것은 조상도 다른 무엇도 아니고 지금 네가 어떻게 행위 하느냐”란 얘기를 듣고 나면 굴종적인 생각들을 벗어던지지 않을까요. 이것이 구원 아닙니까?


오강남 그렇죠. 그게 해방이죠.


도법 이거 말고 거룩함이나 구원을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오늘의 종교집단이야 말로 가장 속되죠. 제가 볼 때 일반 사회는 훨씬 거룩해졌습니다. 저는 불교계를 향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권 문제를 한 번 봅시다. 만민평등이나 남녀평등은 사회에서는 이미 상식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계는 철저히 계급화 되어 있습니다. 불평등이 판을 칩니다. 이렇다면 불교가 훨씬 속된 집단이고, 사회가 더 거룩해진 것 아닙니까.


김민웅 확실하고 멋진 정리네요.


도법 그래서 집단 종교가 갖고 있는 속됨을 짚어내고 일상 속의 거룩함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민웅 나사렛 예수도 거룩한 척 하는 당시 종교인들이 속된 자들이라고 질타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씨 뿌리는 것 안에 담겨 있는 거룩함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죠. 교회는 속된데 성(聖)의 언어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까 썩어가는 것을 자각 못하는 겁니다.


도법 자기 언어에 빠져 있는 거죠.


김민웅 그래서 종교계는 썩어가는 것을 인식을 할 수가 없었어요. 교회가 거룩한 종교 언어를 쓰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아멘·할렐루야가 나오면 교인들이 미안하지만 자동적으로 파블로프의 개가 됩니다. 특정한 자극 앞에서 조건 반사하는 거죠. 아멘! 할렐루야!가 언제든 튀어나오는 방식으로 훈련시키니까요. 종교가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끌어나갈 능력을 제거해 버리는 거죠. 일상과 교회라는 분리된 삶을 살면서 양심이 괴로움을 받지 않는 겁니다. 


오강남 종교적으로 심층에 속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회의 기본 가치를 뒤집어엎는 거거든요.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공자님도 그랬어요. 공자 당시의 군자란 혈연적인 군자였어요. ‘그러다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군자이지 피와는 관계없다’고 된 것입니다. 조선 말기의 수운 최제우는 ‘우리가 다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가 하늘님이다. 다른 사람을 하늘님으로 대하라’고 했어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사회보다 앞서 나가던 종교의 얘기였죠. 최제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서 한국에 퍼지게 된 것도 ‘우리가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다. 어떻게 상놈의 피와 양반의 피가 있다는 거냐, 라고 했기 때문이거든요. 이렇게 사회를 뒤집어엎는 모험이 계속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뭐에요? 스님 말씀대로 종교가 사회를 따라가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 종교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염려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일상의 거룩함을 상실하고 세속화된 종교


김기석 레위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대명제가 나오고, 그 뒤에 거룩한 삶을 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교적인 얘기는 안식일 지키라는 얘기밖에 없습니다. ‘추수할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밭의 한 모퉁이 남겨두는 것’이 거룩함이에요. ‘장사할 때 저울로 속이지 말고, 노인들한테 저주하지 말고, 장애인들 앞에 걸림돌 놓지 않는 게 거룩함’인 거예요. 거룩함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울로 속여 먹지 않거나 내 먹을 것을 밭에 조금 남겨두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요.


도법 저는 절집에서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복잡하게 설명하면 잘 모르겠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도법이가 도둑질 하면 도둑이 될까 안 될까?” 그러면 도둑놈이 된다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도둑질하면 도둑이 될까 안 될까?” 그러면 조금 망설여요.(일동 웃음) 어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이 도둑질 하면 도둑 될까 안 될까?”라고 물었어요. 결국 도둑질하면 도둑놈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요. 도법이 도둑질 하면 도둑놈 되고, 부처나 예수도 도둑질하면 도둑놈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특별하게 예수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일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도둑질하는 부처가 부처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럼 부처와 예수는 없는 것일까. 없다고 그러기도 그렇죠. 결론은 예수의 행위를 하는 자는 예수이고, 부처의 행위를 하는 자는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나 예수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종교 언어들을 현장의 삶과 직결시켜야만 종교 언어가 갖고 있는 변질되거나 왜곡된 것을 깨고 본래 기질을 드러낼 수가 있어요.


김인국 이렇게 뜻도 통하고 맘도 맞는 사람들이 얘기하면 시원하죠. 그런데 집에 가면 이게 또…(웃음)


도법 우리 다 집을 나옵시다.(일동 웃음)


김인국 지금 우리가 종교의 핵심과 본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이런 지당한 담화가 여기서 문을 열고 한 걸음만 나가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게 문제지요.


도법 한 길 밖에 없어. 출가해야 돼. 다 자기 집을 나오는 거야.(일동 웃음)


오강남 집을 나온다는 것은 통념에서 벗어난다는 거예요.


김기석 아브라함도 집을 떠났지요.


오강남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기는 통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님 말씀에 동감인데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저울눈을 속이지 않는 등의 행위 자체에 너무 무게를 두면 문제가 됩니다. 율법주의가 되거든요. 행위를 위한 행위가 아니고 어떤 사물의 실제를 본 의식의 전환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간디의 말에 의하면 그게 샤타그라하(眞理把持)에요. 실제를 봤다는 것은 심층에 들어갔다는 얘기죠. 심층에 들어가면 레위기 19장과 같은 행동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종교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바리새적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어요.


김민웅 김 신부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물론 우리끼리는 다 통하는데, 라는 차원도 있지만 덧붙여서 고민해야 될 것도 있는 거 같아요. 김기석 목사님께서 해석학적 투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펼쳐내기 위한 말을 고민하고, 그런 말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치열하게 해야 될 것 같다는 거예요. 김교신 선생은 성서 해석에서 굉장히 재밌는 우리말 표현을 한단 말이죠. 재회의 환희를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나? 재회의 기쁨이나 다시 만난 기쁨보다는 “아이고 또 보니 너무 반가워라”라고 표현하셨어요. 우리나라에서 다산 연구의 최고봉이라는 이을호 선생이란 분이 계십니다. 작고하신 분인데 이분의 논어해제가 굉장히 뛰어나요. 우리는 공자의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번역하지만 이을호 선생은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라고 읽어요. 순 우리말로 표현한 거죠. 시(時)도 족족이란 말로, 학(學)도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람 되는 길’에 대한 배움이라 표현합니다.


오강남 그런 해석학적인 면은 류영모 선생님을 따라 갈 사람이 없어요.


김민웅 이렇게 우리의 말 속에 담겨진 무궁무진한 것들을 캐내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집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쉬운 언어와 화법을 우리가 아직 찾아내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몰라요. 이것은 사실 지식 계급이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그래서 교회 용어를 철저하게 깨고, 낮아져서 일상의 언어를 가지고 예수가 이야기를 쉽게 풀었듯 우리도 그런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이런 종교라면 망하는 게 낫다


도법 오강남 교수님이 심층, 표층이라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심층으로 들어가자면 다들 어렵다고 도망갈 것 같아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면 좋겠어요.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야’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없는 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저는 이게 문제라고 봅니다. 이러면 사기 칠 가능성이 대단히 많아집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별 볼일 없고 제3의 눈으로 봐야 진짜라는 생각! 제가 볼 때 종교의 사기성은 거기서 나온다고 봐요. 불교도 만날 전생과 내생 이야기만 해요.


김인국 절집에서는 통 현세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하시는구나.(웃음)


도법 저는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거룩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도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는 허망하다. 신령성이란 뭔가의 안에 있다.’ 우리가 그 신령성을 찾아야 된다는 거죠. 대부분의 종교 언어들은 늘 이런 식이거든요. 이것을 깨지 않고서는 종교가 스스로 속든 다른 사람을 속이든 간에 이런 일이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거룩한 것을 설명해야 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참됨을 설명하는 작업들이 나와야 된다는 봅니다.


오강남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세상에서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현실에서 안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본다는 것은 신령이나 귀신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심에 쌓여서 못 보던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거겠죠.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현실이나 경제현실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보는 것은 ‘돈 버는 것이 최고’라는 거예요. 그런 세상에서 자본주의가 아니라 평등사회가 이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심층이겠죠. 제가 말한 심층이란 귀신, 내세를 얘기한 것이 아니에요. 귀신이니 내세니 하는 것은 보여주면서 속이는 거죠. 사실 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거예요. 엉터리로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이 하신 일은 상식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성(聖)이라는 글자에는 ‘귀’가 들어 있잖아요. 귀가 들어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끌고 가야 해요. 도법 스님도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거잖아요. 사회보다 지금 불교가 나쁘다는 것을 보통 불교인들은 못 보는 거예요. 때문에 도법 스님은 사람들에게 안 보이는 것을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시는 거죠.


도법 오 교수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해요. 일반적으로 불교는 ‘눈으로 보는 것은 진짜가 아니야. 마음으로 봐야 해’ 그러거든요. 제3의 눈은 주로 전생이나 내세를 보는 것으로 이해를 해요. 교수님 말씀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세가 그렇다는 겁니다. 보통 눈으론 전생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마음이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런데 ‘육안으로 보는 것은 전부도, 진짜도 아니고 오로지 마음으로 보는 것만 제대로 보는 거야.’ 이렇게 되거든요. 이런 부분들을 깰 수 있으려면 ‘상식의 눈으로 봤을 때 돈이 제일이야’라는 생각을 ‘상식의 눈으로 봐도 돈이 제일이 아니야’라고 얘기해줘야 됩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 말고 다른 뭔가를 봐야 된다고 할 게 아니라 상식의 눈으로 봐도 돈이 제일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종교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이 작업을 해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어요. 종교가 종교다워지려면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오강남 저도 스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상식이 아닌 상식을 상식으로 깼다면 보통 상식보다 좀 깊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펄쩍펄쩍 뛰며 기도하는 게 심층이 아니라 조금씩 깨우쳐 가고, 조금씩 리얼리티에 가깝게 가는 게 심층입니다. 전생이 어떻고 귀신이 어떻고 하면서 협박하여 돈을 뜯어낸다면 이것은 사기죠.


도법 유명한 성철 스님이 한 이야기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게 있잖아요. 사실은 성철 스님이 특별하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어록에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에요. 불교 사유방식인 거죠. 정확하게 말하면 네 단계예요. 처음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야. 다시 보니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야. 또 다시 보니까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야. 다시 보니까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야.

김민웅 그런데 그때 산은 굉장히 다른 산이죠.


도법 문제는 다른 얘기는 않고 이것만 갖고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종교들은 눈으로 보는 문제를 자꾸 다루면 이것을 속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그리고 뭔가 육안 말고 다른 것으로 볼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해요. 그런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하나님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논리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유교의 도라는 개념도 있는 것 가지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가 이상한 얘기를 갖고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세상을 기만하는 것에서 빠져 나올 수 있어요.


김민웅 예수에게 그런 것이 분명 있었죠. 오병이어라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도 배고픈 자의 현실이 눈앞에 있어서 출발한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직면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문제를 풀라는 거죠.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얘기로 풀어나갑니다. 김기석 목사님이 공감에 대한 얘기를 하셨어요. 일상에 대한 이야기, 본질에 대한 이야기,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저는 기존의 종교라고 이름 붙여진 기독교나 불교가 정말 탁월하고 속 깊은 무당보다 못한 것 같아요. 발군의 무당은 아픈 사람의 마음과 완전히 만나더군요. 저는 사람의 마음을 부둥켜안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렸던 마음을 종교가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까 해석학적 투쟁 이야기를 하셨지만 최제우도 그렇잖아요.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아파한 것 아니에요? 하늘의 마음을 품고 백성의 마음을 껴안다 보니까 그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예민함이 울림을 만들어내고, 억울하게 죽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불러내고, 그리고는 살아있는 자와 만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만드는 능력이 종교의 본성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많이 상실해버린 것 같아요. 그것을 잃어버리다 보니까 성당이든 절이든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울림을 갖지 못하는 거예요. 교리나 신학이나 사상보다 더 깊게 모든 종교가 현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잃어버려서 사람들이 점을 보러 가고 굿을 합니다. 사실은 교회가 현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부둥켜안고 그것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되는데 안 하죠. 거의 철저하게 안 한다고 봐요. 교회가 아파하고 힘든 사람들을 끊임없이 짓밟는 현실과 대결하는 용기와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게 속상한 거죠.


김인국 오늘의 교회가 어릴 적 나를 키워준 그 때의 고마운 교회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이런 교회를 위해서 청년시절에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하고 노래를 불렀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단 말입니다.


김민웅 스님 말씀대로 출가를 하시지요.


김인국 출가한 사람들은 별 수 있나요.


도법 다시 출가하자는 거죠.(일동 웃음)


김인국 사회는 엉망이고 강과 바다는 망신창이가 됐는데 종교는 아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교가 회사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종교라면 망하는 게 낫습니다. 얼른 망해야 얼른 새로 나지요!


오강남 종교가 망해야 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도법 종교는 없다고 선언합시다.


김민웅 이 책 제목은 그러니까 망할 놈의 종교네.(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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