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기 행복론의 허구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44)


더하기 행복론의 허구



내가 행복한 까닭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거나

내 곁에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얼마나 내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고,

하나님에 관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붙잡을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그 매혹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소유하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라. 그러면 그것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 출시된 신상품을 구입하라. 그러면 그것이 그대에게 더 큰 기쁨과 만족을 안겨 주리라. 나는 이것을 ‘더하기 행복론’이라 부른다.




동화 <행복한 한스>의 주인공 한스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만족을 찾아 기꺼이 ‘더하기 행복’의 사슬에 묶인 노예가 된다. 한스는 욕망의 돌덩어리를 물에 빠뜨리고 나서 자기가 붙잡으려던 행복의 허구를 깨달았지만, 오늘 우리들 가운데는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돌변하는 파산을 겪고서도 그 허구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던가. 자기 삶에 무언가를 보탬으로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행복에의 집착은 찰거머리처럼 질기다. 이 집착의 찰거머리를 떼어내는 길은 없을까. 

       

모든 것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맛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를 쓴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세기 때 스페인에 살던 수도사로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위대한 신비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말아야 한다! 얼마나 어려운 주문인가. 시어들은 어렵지 않으나 시어들이 가리키는 바는 결코 쉽지 않다. 젠장, 도인도 수도자도 아닌데… 나처럼 세속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시의 행간을 잘 들여다보자. 앞의 모든 양보절을 보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인간이 지닌 욕망을 무조건 금하지 않는다. 욕망의 금지보다는 욕망의 승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욕망의 승화라니?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에 매이기 때문이다. 탁 트인 바다의 광활함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강줄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며 삶의 한가로움과 여유를 얻은 사람은 새를 붙잡아 자기 새장에 가두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사물에 매이지 않고 사물을 즐기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고 돈을 쓰되 돈을 사랑하지는 말 것. 돈을 사랑하면 돈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명함에 대한 집착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 이름 석 자 뒤에 꼬리말처럼 붙어 다니는 명함에도 집착하면 우리는 거기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난 아예 명함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이름들보다 더 큰 분에게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 뒤에 붙는 꼬리말들은 내가 잠시 머무는 둥지일 뿐.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까고 나면 제 둥지를 버리고 더 큰 둥지인 하늘로 날아가듯이, 나의 궁극적 소속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둥지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했듯이,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곧 그것이다. 수도자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