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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톺아보기

순례자로 산다는 것

by 한종호 2016. 2. 10.

김기석의 톺아보기(22)

 

순례자로 산다는 것

 

‘즐거운 망각’의 탐닉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시간에도 이빨이 있음을 자각한다. 시간은 우리 몸과 영혼에 지우기 어려운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우리에게 새겨놓은 무늬를 사람들은 문화라고도 부른다. 사람의 모듬살이는 문화를 형성하지만, 그 문화는 동시에 우리의 존재조건이 되기도 한다. 외부 세계와 낯을 익히는 과정, 그것이 삶이다. 나의 ‘있음’은 늘 ‘~이다’라는 술어로만 표현된다. 나의 있음은 늘 ‘더불어 있음’이다. 누군가와 맺는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추한다. 사람은 신 앞에 선 단독자이지만, 그래서 늘 우주의 중심이지만, 그의 있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들의 존재이다. ‘관계맺음’이야말로 인생이다. 문제는 이 관계의 그물망이 우리가 허무의 물결에 실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자유로운 삶의 열망을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관계, 그것은 기쁨의 뿌리이기도 하지만 권태의 뿌리이기도 하다. 어느 날 평온한 일상 속으로 느닷없는 불안감이 찾아올 때, 허무라는 낯선 손님이 찾아올 때, 돌연 세상은 낯선 곳으로 변한다. 이전에는 그리도 아름답게 보이던 것이 역겨워지기도 하고, 목숨을 걸 만큼 소중했던 것이 시큰둥해지고, 자기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 갑자기 고개를 들었을 때 느끼는 어지럼증처럼 사람은 시간 속에서 멀미를 한다. 입덧에 시달리는 임부처럼, 허무감에 잠겨 시름할 때, 사람은 그 어떤 서술어로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는 ‘나’의 존재에 대해 묻게 된다.

 

허무의 어둠은 거울의 배면이 되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영해준다. 실존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 여행자인 인간의 삶은 자기 동일성 혹은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을 지배하는 정조는 불안이다. 어쩌면 불안은 인간의 존재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불안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은 우리가 잊고 사는 본래적 실존의 소환장이다. 사람들은 그 소환장을 애써 외면하면서 소유, 업적, 지위, 쾌락 등 ‘불안의 대용물들’을 찾기에 급급하다. 불안이 제기하는 내적 성찰에의 요구를 견딜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망각’의 기법을 동원한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오뒤세우스 일행은 꿈에도 그리던 이타카를 향해 귀향을 서두르고 있었다. 아흐레 동안이나 풍랑에 시달리며 표류하던 그들은 로토파이고이족의 나라에 당도했다. 원주민들은 염탐하러 온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을 환대하면서 로토스라는 열매를 주었다. 호메로스는 이 대목을 이렇게 전한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를 먹은 자는 소식을 전해주거나 귀향하려고 하기는 커녕, 귀향은 잊어버리고 그곳에서 로토스를 먹으며 로토파고이족 사이에 머물고 싶어했소.”(호메로스, 《오뒤세이아》, 제9권 93-97행, 천병희 역, 단국대학교 출판부)

 

오뒤세우스는 울고불고하는 이들을 억지로 배로 데려가, 노젓는 자리 밑에 묶어놓고는 ‘아무도 로토스를 먹고 귀향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출항을 독려했다. 귀향을 망각해버린 부하들과 그들을 신산스런 삶의 자리로 되돌려놓은 오뒤세우스, 둘 중 누가 잘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미 로토파이고이족의 주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뒤세우스처럼 우악스럽게 우리를 끌어다 마땅히 가야 할 길로 데려가려는 이도 없다. 그래서 대개는 순례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잊고, ‘즐거운 망각’에 탐닉한다. 지금 사람들이 먹은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 열매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존재를 소유로 치환하는 사람들

 

사람은 모두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한다. 세상 소풍에 취해 있던 어느 날 하늘에서 ‘올라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사다리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더러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며 하늘 바라보기를 그만 뒀다. 어떤 이들은 지금도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찾고 있다. 그들은 ‘떠나온 곳을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는 사람들이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지 마라

참참이 참아가서 영원한 참 갈 것이니

참든 맘 참 참을 보면 가득 참을 얻으리.

 

-함석헌, <참> 전문

 

인생 여정은 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싫든 좋든 사람은 길 위에서 살아간다. 길 위에 있다는 것은 늘 변화를 향해 자기를 열어놓고 산다는 뜻이다. 자기 부정을 본질로 하는 변화는 평안과 안전을 구하는 마음과 늘 길항한다. 변화의 계기는 외부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떠나라’라는 단어는 길 위의 실존에 대한 암시가 아닌가? 참을 찾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참참이 걸어감, 곧 참음이다. 영혼의 어둔 밤이 찾아오는 순간에도 끝끝내 가야 할 길을 잊지 않는 사람만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참음으로 걷는 길의 목표는 영원한 참에 이르는 것이다. 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는 어느 순간 엄범부렁한 자기 속이 가득 채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달콤하고 가슴 벅찬 순간이다.

 

‘그 길’의 운명은 지금 어떠한가? 통행인이 뜸하여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가? 한 밤중에 ‘골짜기 문’을 나서, ‘용 샘’을 지나 ‘거름 문’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성벽을 살펴보던 느헤미야는 성벽은 다 허물어지고, 문들도 모두 불이 탄 채 버려진 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샘 문’과 ‘왕의 연못’에 이르렀을 때에는 더 나아갈 길이 없었다(느헤미야 2:11-18 참조). 진군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에게 도래한 소비사회의 휘황한 불빛은 우리 눈을 어지럽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존재를 소유로 치환하는 세대에 사람들의 영혼은 더욱 납작해졌다. 이 시대의 느헤미야는 지금 어느 거리를 걸으며 탄식하고 있을까? 모두가 걸어야 하는 ‘그 길’은 잊혀진 길이 된 것은 아닌지?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서울에는 사람 낚는 어부가 없다

바다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서울에는 동백꽃이 피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슬에 젖지 않는다

서울의 눈물 속에 바다가 보이고

서울의 술잔 속에 멀리 수평선이 기울어도

서울에는 갈매기가 날지 않는다

갯바람이 불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조차 두려워하며

누구나 바다가 되고 싶어 한다

 

정호승,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전문

 

바다가 되고 싶지만 바다로 가는 길도 보이지 않고, 이슬에 젖지도 앉는 서울, 인정의 사막인 그 메갈로시티 저편으로 낙타를 탄 누군가가 흔들거리며 나아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존재를 소유나 지위로 치환해버리는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귀 밝은 이들에게는 소금산 꼭대기에서 ‘나는 외롭다, 누군가 나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외치는 ‘어린왕자’의 음성이 아련하게 들려올 것이다. 그 음성은 잃어버린 본래적 삶에 대한 그리움을 우리 가슴에 심어준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도 없는 영혼의 심연

 

모든 종교는 순례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거룩한 기억이 깃든 곳으로의 순례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 삶의 질서를 새롭게 세우기 원한다. 그것이 신탁을 듣기 위한 것이든, 치료를 구하기 위한 것이든, 경배를 위한 것이든, 참회 혹은 정화를 위한 것이든, 순례는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초월적 질서와의 소통을 희구하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고생이다. 오체투지로 라싸를 향해 나아가는 티베트 순례자들의 모습은 편안함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경이롭게 다가온다. 눈 덮인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몇 걸음마다 한 번씩 땅바닥에 손과 발 이마를 대는 그 고단한 여정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그들의 경험의 진실성과 고백의 적실함을 종교적 편견으로 예단하는 일은 정말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들을 잡아끌고 있는 내적인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일상의 흐름을 끊고 순례 길에 오르게 했을까? 그것은 목마름 혹은 헛헛증일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이 가장 경계한 것은 ‘아케디아’(akedia)였다. 그것은 흥미 없음, 나태함, 불만, 권태, 오늘을 살지 못함을 뜻한다. 우리도 일쑤 경험하는 아케디아는 ‘떠나라’는 명령이 아닐까? 어떤 것으로도 해소될 수 없고, 채울 수도 없는 영혼의 심연에 직면할 때, 자신과의 불화를 절감할 때, 참된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에 시달릴 때야말로 길의 부름을 받을 때이다.

 

로마의 북부에는 수비아코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은 성 베네딕도의 동굴로 유명한 곳이다. 로마의 귀족 자제였던 베네딕도는 허영과 사치와 폭력으로 점철된 현세의 삶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수비아코의 작은 동굴에 들어와 몇 년 동안을 기도생활에 전념했다. 그곳에서 그의 영혼은 정화되었고, 흙가슴으로 곱게 갈아엎어진 그의 영혼의 향내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대 그레고리오의 <대화록>에 나오는 베네딕도의 일화 중에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한 미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여자는 어떤 마음의 충동 때문인지 한 곳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고,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으로, 계곡으로, 숲으로, 들로 쏘다녔다. 기력이 다하여 쓰러졌을 때만 쉴 뿐이었다. 정처 없이 헤매던 어느 날,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거룩한 베네딕도의 동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문 다음 날, 그는 언제 미쳤었냐는 듯 싶게 멀쩡해져 있었다. 그는 여생을 온전한 정신으로 삼았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오늘의 교회가 베네딕도의 동굴이 될 수는 없을까 생각하며 아뜩해진다.

 

기독교인들의 순례의 전통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헬레나의 예루살렘 방문 이후 성지순례는 신실한 신자들의 꿈이었다. 그런데 평신도들의 성지순례가 활성화된 것은 11세기 무렵부터이다. 파리 근교의 클루니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회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에 시달리던 평신도들에게 예수와 성인들과 관련된 땅으로 순례여행을 떠나도록 격려했다. 여건상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사도들이 묻힌 것으로 믿어지는 곳으로의 순례는 대단히 활발해졌다.

 

베드로가 묻힌 곳으로 믿어지는 로마, 아리마대 요셉이 묻힌 곳으로 믿어지는 글래스톤베리, 야고보가 묻힌 곳으로 믿어지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를 향한 순례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여행 중에 순례자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배울 수 있었고, 한시적이긴 하지만 세속적인 삶을 뒤로 하고 수도사적인 삶을 살았다. 순례의 여정 중에 그들은 독신자처럼 지냈고, 다른 순례자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분투했다. 순례자들은 서로 싸우거나 무장을 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런 소박한 순례의 전통은 곧 오염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그것이다.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성묘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유럽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교 공동체에 대한 약탈을 정당화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십자군 전쟁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예루살렘에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가 만난 현실은 벌거벗은 폭력과 약탈뿐이었다. 십자군들은 애초의 뜻을 저버리고 어떻게 약탈을 하고, 여자를 노예로 삼고, 사라센 사람들을 학살할 것인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그들 사이를 걸으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설교했지만 병사들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롱하기까지 했다.

 

“주여, 전쟁의 피 속에서 인간은 피에 굶주린 짐승이 됩니다. 당신께서 내려 주신 얼굴을 버리고 늑대가 되고 더러운 돼지가 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인간의 얼굴을 되찾게 해주소서. 당신의 얼굴 말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2》, 315-6쪽, 열린책들, 2008)

 

자기가 문제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의 순례는 그 고상한 명분이 무엇이든 타락하기 쉽고, 폭력과 결합하기 쉽다.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

 

이런 사례가 있다고 해서 순례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 왜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일까? 왜 이슬람은 무슬림들이 평생 한 번은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일까? 의례화된 순례는 미래로부터 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재빨리 흘러가는 시간에 매듭을 지음으로 삶의 리듬을 만들기도 한다. 시간의 매듭인 순례 축제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 삶을 장구한 역사 속에 위치시키고, 다른 이들과 긴밀히 연결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순례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사람들을 머리에 그려 보라. 그 길에서 순례자들은 공동체적 공명을 경험할 것이다.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저 산꼭대기에 서있는 낙락장송이 되기보다는 어울려 숲을 이루는 나무가 되고 싶다던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 가리키는 바도 이것이리라.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이들의 행장은 단출해야 한다. 어쩌면 순례란 잃어버린 ‘단순함’을 찾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누리며 살던 모든 것을 가지고 순례를 떠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순례는 불편함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90세의 철학자 버틀란드 러셀이 반핵시위 도중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티쉬 쿠마르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흔 살 노인도 인류를 위해 감옥에 가는데, 젊은 우리는 지금 무얼 하는 건가?” 그래서 그는 벗인 메논과 함께 핵 보유 강대국들을 순례하는 평화 행진을 하기로 작정하고는 축복을 받기 위해 큰 스승인 비노바 바베를 찾아갔다. 비노바 바베는 그 기특한 젊은이들에게 두 가지 무기를 선물한다.

 

첫째는 어디를 가건 채식주의를 실천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단 한 푼도 몸에 지니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황하는 사티시 쿠마르에게 비노바 바베는 “항아리는 비어 있어야만 속을 채울 수 있는 법”이라고 참된 인간관계에 돈은 장애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순례를 하다 지쳤을 때 돈이 있다면 호텔에서 잠을 자고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겠지만, 돈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선의를 가지고 환대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비폭력과 평화에 대한 비전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과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이런 삶은 불가능하다. 순례자가 되어 어딘가를 향해 간다는 것은 그곳에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의 지층, 내밀한 욕망, 충일한 기쁨의 뿌리는 지하 깊은 곳에서 인류의 경험과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될 때, 낯선 이들은 사라지고 타인들을 향한 적대감은 스러지고 만다.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사람은 소유뿐만 아니라 직함과 가면과 역할도 내려놓아야 한다. 순례 길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순례 길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허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순례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약함에 직면하게 된다. 길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의 허영심을 벗겨내고, 자신이 누군가의 호의와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절감하게 만든다. 순례가 주는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허영심을 내려놓고 자기의 약함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동행이 된다. 더 이상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바심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영문도 모르고 질주하던 삶에서 벗어나 현실을 자세히 보며 산다. 그 순간 그는 세상에 가득 찬 은총에 눈을 뜬다.

 

무명의 백태가 벗겨질 때,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는 숭고한 감정이 솟아오르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귀속될 수 없는 불멸성을 간직한 존재임을 두려움으로 깨닫게 된다. 이런 자각을 가진 사람, 가슴에 불멸의 불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 시간 여행자인 인간은 모두 순례자이다. 그 순례는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고, 영원한 참으로 가득 참을 얻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그 순례의 도구는 발이 아니라 가슴이다. 우리 스승은 말했다. 그 길은 좁아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길, 참의 길이 우리를 부른다. 중세부터 전해오는 이야기.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Turistas manden; peregrinos agradecen)”. 당신은 어느 쪽인가?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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