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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톺아보기

행동하라는 요구

by 한종호 2016. 1. 29.

김기석의 톺아보기(18)

 

행동하라는 요구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의 기본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 때문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있지 아니하고, 그 변혁하고 자유하게 하는 힘을 인식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인식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참으로 듣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작용하기 때문이다.(토마스 머튼)

 

속이 허할수록 말은 부박해진다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사념이 덧없게 느껴지고, 말의 부질없음이 아리게 다가올 때마다 나는 고진하 시인의 시 <黙言의 날>을 읽는다. 마치 해독제를 들이키듯….

 

하루종일 입을 封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封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나도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지고 싶다. 미처 숙성되지도 않은 말들을 쏟아내고, 홀로 남겨진 시간 자괴감에 시달릴 때면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가 되고 싶다. 제집을 찾지 못한 말들이 곳곳을 떠돌며 음란하게 교미하는 시대에 말을 부리며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은 일종의 천형이다.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말, 누군가의 가슴에 파고들지 못하고 귓전에서 스러지고 마는 말이 범람하고 있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고, 말씀의 홍수 시대에 정작 들을만한 말은 많지 않다.

 

속이 허할수록 말은 부박해진다. 내면에 고이고, 온축되고, 발효되어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공감의 언어가 사라지면서 지시적 언어가 많아지고 있다. 지시적 언어는 시비와 대립을 조화시키기보다는 갈등과 대립을 조장한다. 살리는 말이 아니라 죽이는 말이 횡행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의 가슴에는 저마다 상처자국이 있다. 또한 우주적 차원을 잃고 사소에 빠진 말들은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경박한 호기심만 부추기면서 우리 삶을 사소화한다. 존재의 집이라는 언어가 타락하자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큰 말은 조용하지만 작은 말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다. 아, 옛 시인들은 어떻게 세상을 가득 채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2-4a)

 

말씀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성경에 ‘들어라’는 말이 넘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들어라 이스라엘!’,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물론 말씀은 외적 감각 기관인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마음으로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속에서 엉머구리 들끓듯 하는 욕망의 말들이 잠잠해져야 한다. 우리 속이 말끔히 비워질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말씀과 만난 사람은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1)는 말씀과 만나 새로운 세상에 눈 뜬 사람이 있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8:20)라는 말과 만나 가파른 인생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이들도 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로마서 13:11)라는 말씀과 만나 새 사람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도 있다. 성경을 삶의 ‘척도’로 삼아 그 말씀을 기준 음으로 삼고 자기 삶을 조율하는 사람들, 그들은 말씀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징표들이다.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이 갈급한 영혼과 만날 때 신적인 불꽃이 점화된다. 물론 욕망의 습기로 눅눅해진 영혼에는 그 불꽃이 점화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문예 비평가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성경을 가리켜 ‘산고(産苦) 속에 있는 텍스트’라 했다. 성경은 언제나 새로운 몸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모든 때와 장소에 들어맞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체계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진리를 제시한다. 처음부터 완결된 이야기도 있지만, 오랜 전통을 통해 변화과정을 겪어온 이야기들도 있다. 성경은 후자에 속한다. 성경이 전해주는 이야기 속에는 수 천 년의 역사가 온축되어 있고, 이야기를 전승해 온 사람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에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접힌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그 해석은 다양하고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 주목하느냐 혹은 어떤 전승 주체의 입장에 공감하느냐에 따라 같은 본문도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으니 말이다.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성경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은 해석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을 삶에 관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간주한다. 성경을 삶과 역사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처방전(prescription)으로 보는 것이다. 이때 성경은 닫힌 텍스트가 되고 만다. 마커스 보그는 성경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볼 것을 제안하면서 역사적(historical), 은유적(metaphorical), 성례전적(sacramental)이라는 세 개의 형용사를 제시하고 있다. 성경이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기록된 텍스트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이고, ‘문자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뜻에서 ‘은유적’이고, 신성한 것을 매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례전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앨리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사람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듣는 이야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관점과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야기가 갖는 힘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자아낸다는 데 있다. 이야기를 듣는 시간, 그 이야기는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 현전(現前)한다. 과거의 맥락과 우리 삶의 맥락이 만나 새로운 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창조와 출애굽, 십자가와 부활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 된다. 그래서 이야기는 생성이다. 성경에 대한 해석은 이미 있는 의미를 수용하는 것이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를 빚어내는 일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의미를 해석해 놓은 단테를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린이용 단테를 읽는 게 낫다”고 말한 바 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찾아가는 모험과 도전에 뛰어드는 것이기에 자아나 편견에 사로잡힌 자 혹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위험한 여정이다. 그 여정은 어쩌면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 한복판을 통과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맛있게 느껴지던 것이 맛없어지고, 확실하던 것이 불명확해지고, 확신은 회의로 바뀌기도 한다. 자아 정체성은 흔들리고 삶의 평온이 깨지기도 한다. 그것은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일이기도 하고, 모리아 산을 오르는 길이기도 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불꽃 앞에 서는 일이기도 하고, 구름이 덮이고 천둥이 치고 있는 산정에 오르는 길이기도 하고, 길도 없는 광야길을 걷는 길이기도 하고, 골고다를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길은 우리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삶을 체험하는 길이기도 하다. 울면서라도 그 길을 걷는 이들은 하나님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예수가 ‘모른다’고 한 문제에 대해 자기들은 ‘안다’고 말하는 이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삶에 지친 이들은 성경의 전복적 메시지를 꺼려하고, 교권주의자들은 성경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새로운 중세인 셈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기준음으로 삼아 자기 삶을 조율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욕망을 기준음으로 삼아 성경의 메시지를 조율하고 있다. 성경으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성경읽기(exesesis)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욕망을 성경에 투사한 성경읽기(eisegesis)가 넘친다. 듣기로서의 성경읽기의 시작은 질문을 던지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인생이 문제임을 아는 사람은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인간은 자유로운가?’ ‘인간은 왜 죽음을 피할 수 없나?’ ‘왜 무고한 자가 고통당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질문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 이야기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다가, 인식의 극단에 이르러 침묵할 수밖에 없을 때, 마침내 우리는 어떤 불가지한 실재에 마주치게 된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묻다가 하나님의 크심과 신비에 부딪히는 순간, 언어도단의 세계와 만난 욥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질문에 대답해보라는 하나님의 다그침에 언거번거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욥기 40:4)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교권주의자들은 어쩌면 그리도 욥의 친구들을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에게 모호함은 악덕이고, 믿음 없음이다. 그들은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도 말할 수 있고,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죽어간 사람들, 테러와 전쟁으로 인해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말했던 일부 종교인들의 오만함은 끔찍할 정도이다. 그들은 예수가 ‘모른다’고 한 문제에 대해 자기들은 ‘안다’고 말한다.

 

체코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은 <말의 힘>이라는 글에서 언어가 오용될 때 얼마나 참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경고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찬란한 지평을 열어주다가, 다음번엔 수용소 군도에 이르는 통로를 세우기도 한다. 같은 말이 한 시점에서는 평화의 주춧돌이었다가, 다음 순간엔 그 음절 하나하나마다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질 수도 있다.”

 

말을 다루는 이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말이 평화의 주춧돌인지 기관총 소리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성경을 금서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독재자들의 최대 실수’라고 말한 바 있다. 성경은 차별과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모든 권력의 하수인들과 권력의 추악한 얼굴을 가차 없이 폭로하는 동시에, 자비와 돌봄과 자유와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을 끊임없이 가리켜 보이기 때문이다. 혼신의 힘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가 있는 한 독재는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이 오용되기 쉽다는 점이다. 자신의 증오, 편견, 이기심, 배타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전거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우상 숭배'를 금하는 성경 구절을 붙들고 이웃 종교를 우상으로 규정하는 이들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릇된 확신에 사로잡힌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 혹은 신념이 우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남과 싸우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자기 속에 깃든 무지와 맹목과는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요한복음 16:2b)이라고 하셨던 예수의 통찰은 무섭도록 예리하다. 모든 열심이 좋은 것은 아니다. 바른 이해와 분별력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은 남도 해치고 자기 자신도 망가뜨린다. 종교적 담론은 자칫하면 폭력과 손을 잡기 쉽다. 그렇기에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성경은 끊임없는 성찰 과정을 거쳐 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선율

 

성경의 세계를 한 두 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선율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공명하는 이들의 또 다른 사랑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두 가지 사랑에 대한 다양한 변주곡이다. 그런데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파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이들을 짠하게 바라보시며, 그들의 살 권리를 되찾도록 인간사에 개입하신다. 그 사랑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어루만질 때는 부드러운 바람이지만, 불의와 억압의 세상을 향할 때는 온 세상을 휘몰아치는 태풍이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닮지 못한 불초(不肖) 신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교회는 불의에 대해 저항할 줄도 모르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애린의 마음조차 잃어버려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진정한 영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내쫓기고,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도 교회는 울지 않는다. 터가 무너지는 세상을 향해 경고의 나팔조차 불지 않는다. 파헤쳐진 산과 강, 그리고 그 속에 깃들어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 신음을 해도 교회는 별 일 없다는 듯 평온하다. 정신의 알짬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생아, 네가 무어냐? 살았느냐? 죽었느냐? 인생아 너는 죽은 거더라. 삶을 모르고 산 것을 좋아하는 맘도 없고 산 것을 산 채로 감당하는 뱃심도 없더라. 생명을 보느냐? 듣느냐? 만지느냐? 먹느냐? 먹어야 산다 하지만 네가 생명을 산 채로 먹을 수 있니? 네가 먹는 것은 생명은 다 빼고 남은 주검의 껍질만이 아니니? 인생아 너는 속이 죽었더라. 산 것에 대들 염을 못 내는 겁장이더라. 모처럼 살았던 것도 네 손에만 들면 죽고야 마는 너 아니냐? 죽은 줄을 확실히 안 다음에야 손을 대고 입을 대려 엉금엉금 기어드는 너 아니냐?”(<人生아> 일부)

 

함석헌은 말씀 주변을 서성이면서도 끝내 말씀을 온 존재로 받들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생명의 불길 그대론 못 견뎌 불은 끄고 미지근한 재만을 안는 가슴.” 참 기가 막힌 지적 아닌가? 유대교 랍비들은 성경을 미크라(miqra), 곧 ‘행동하라는 요구’라고 불렀다. 신앙생활이란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 고투하는 과정이다. 교회의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침묵하는 성경을 깨워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때이다. 기로에 선 한국교회가 살 길은 그 길뿐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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