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어때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53)

 

길을 잃으면 어때

 

 

뭔가 함께 도모하지는 않더라도 바라만 봐도 마음이 절로 흐뭇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간의 무게를 함께 견뎌왔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각자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신뢰 때문일까요? 어제의 모임은 참 즐거웠습니다. 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표현대로 '그냥' 모인 것이기에 더욱 좋았습니다. 어제 우리는 답답한 교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품평하느라고 감정을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들의 존재에서 피어오르는 말만 나누었습니다. 그래서인가요? 헤어진 후에도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미셸 푸코는 이상화된 세계인 유토피아와 착종된 현실 세계인 디스토피아의 ‘사이-공간’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명명했습니다. 그곳은 삶의 여정 가운데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휴식의 공간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중력처럼 우리를 잡아끄는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곳 말입니다. 그런 장소가 곳곳에 있다면 우리는 그곳을 발판삼아 차가운 현실을 넉넉히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장소가 하나 둘 사라질 때 우리 삶은 빈곤해지고, 절망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약화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떠도는 별들처럼 외롭습니다. 그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랑이고, 사랑은 우정의 연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대공황이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에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시작했던 도로시 데이는 “이 외로움 앞에 내놓는 이번 삶의 유일한 답은 공동체”(도로시 데이, 《고백》 복있는사람, 2010년 6월 25일, p.425)라고 말했습니다.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환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겁니다. 타자가 드러내고 있는 차이를 관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차이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동체는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나와 생활방식도 가치관도 다른 이들을 환대하고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낯선 사람들을 의심하도록 길들여졌습니다. 그렇기에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고 타자들과 만나지 못합니다. 아, 물론 이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제 경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와 ‘나’ 사이에 있어야 할 적절한 거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불편해집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이가 너무 버름해지면 차갑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입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사이 좋음’일 텐데 이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도로시 데이도 그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장 안에 피정의 집을 두고 가끔 그곳에 머물곤 했습니다. 고독과 침묵이 없이는 공동체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피정의 집을 마련하려고 그토록 애쓴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역시 굶주리고 목말라서 기운 차릴 음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맡은 일을 하자면 나 역시 먹어야 한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마른 샘이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이처럼 달디단 샘물을 마셔야 한다”(앞의 책, p.461).

 

‘달디단 샘물’이 무엇인지는 어지간히 눈 밝은 사람은 다 알지만 그 샘물을 길으러 가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분주하기 때문이지요. 늘 처리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출애굽 공동체에게 '안식일 계명'을 주신 것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버릇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멈추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바를 정正’ 자는 ‘한 일一’과 ‘그칠 지止’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흐름 속에 있지만 때로는 그 흐름을 단절하고 멈추어 서보아야 내가 선 곳이 어디인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순례길을 걸으면서 겪은 일을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매우 흥미로웠고 유익했습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그 길 위에 하나님이 계시더라 하셨지요? 그 말은 온 몸의 힘을 빼고 터덜터덜 정처 없이 걸어보지 않은 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겁니다. 순례길에 나선 이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자기 자신의 연약함에 놀라기도 하더군요. 길을 걷다 보면 길을 잃기도 하구요. 낯선 곳에서 길을 잃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친숙하던 세계가 느닷없이 적대적인 공간으로 바뀐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길을 잃어보지 않는다면 길을 찾는 기쁨 또한 맛보기 어려운 법입니다. 구글 지도를 켜놓고 걷는 이들도 있더라 하셨지요? 그들은 헤매지 않고 목표한 지점에 정확히 도착할 수는 있겠지만 낯선 길에서 기꺼이 동행이 되어주는 분과 만날 기회는 얻지 못할 겁니다.

 

작년 유럽의 여러 도시를 천천히 걸어 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잠깐 동안은 당황했지만 결국에는 길을 찾을 거라 생각하며 느긋하게 도시를 둘러보았습니다. 같은 장소로 몇 번씩 돌아오기도 하고, 반대 방향으로 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정말 예기치 않았던 사람과 만나거나, 장소와 만나곤 했습니다.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던 인연을 생각하면 길 잃음이야말로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길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이들에게 나는 '일어날 일이 그저 일어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길이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사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정해진 길로 정확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가끔 한눈을 팔거나 해찰하다가 길을 잃기도 하는 이들이 오히려 타자에 대해 너그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한없이 이어지는 숲길을 걸어가면서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을 때, ‘그 광활함과 고요함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절감했다’ 했지요? 그곳에 만약 동행이 있었더라면 그런 느낌이 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혼자였기에 그 광활함과 고요함 속에 잠겨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광야를 그리워하는 것은 오늘의 느른한 일상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에서 홀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절실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광야로 보내신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이육사는 <광야>에서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하고 노래했지요. 산맥조차 범할 수 없는 그 고요함과 텅 빔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가 애집하고 있는 일들이 하찮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겁니다. 이육사는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그곳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요?

 

시속 1km 남짓한 속도로 걸으면서 자기를 빠르게 지나쳐 가는 젊은이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축복하면서 자기 보폭에 맞춰 걸어가던 70대 후반의 할머니 이야기도 인상 깊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날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자기 친구를 기억하고 또 그를 위해 기도하며 걷고 있었다지요? 그 시간이야말로 자기 치유의 시간이요, 세상과 화해하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바빠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혹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던 이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가까운 이들은 당연히 늘 그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만 그들의 존재는 둥두렷하게 드러납니다. 부재야말로 그의 존재를 가장 절실하게 드러내줍니다. 할머니는 그 긴 길 위에서 자기 자신의 인생과 만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또한 그 할머니는 순례를 떠나기에 적당한 나이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그곳에 계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연말이 다가오면서 내 삶을 돌아보니 너무 많은 것들에 둘러 쌓인 채 살아갑니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야 맑아지고 가벼워질 텐데 자꾸만 뭔가를 더하며 살고 있습니다. 비누도 절반으로 잘라내고, 여벌로 간직했던 속옷도 버리고, 일회용 면도기도 몇 개 버리면서 배낭의 무게를 최소한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셨지요? 사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 방이나 장롱에 켜켜이 쌓인 옷이나 살림살이를 보면 마치 내 죄의 무게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우리 내면에 가득 차 있는 것들이지요.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하셨을까요? 우리 내면을 자꾸 비워내지 않으면 악취를 풍길 수밖에 없습니다. 맑은 향기를 풍기며 사는 이들은 거의 다 자기 비움의 명수들입니다.

 

새해에는 비움을 자꾸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을 이미 경험하셨으니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포근하기는 하지만 겨울입니다. 고뿔 조심하시고 내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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