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의 춤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52)

 

조르바의 춤

 

 

평안하신지요?

 

동지녘으로 가면서 밤도 길어졌지만 바람도 제법 칼칼합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조금 벗어나 삶의 좌표를 가늠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분주함이 신분을 나타내는 기호처럼 인식되는 세상에서 ‘멈추어섬’ 혹은 ‘사유’는 사치스러운 군더더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는 고사성어를 아시지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다녀봤지만 갈림길이 많아 결국 놓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오늘은 ‘오로지 그 중심을 꼭 붙잡으라’(允執厥中)는 중용의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요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선양하면서 건넨 말이라지요? 어쩌면 삶이란 하나의 중심을 향한 순례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중심을 잃어 삶이 가리산지리산 엉망입니다. 흩어진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는 법, 그래서 지금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 이야기를 이렇게 부끄러움도 모른 채 하고 있네요. 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순간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습니다. 새로 나온 제 책 제목에 빗대서 ‘광야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셨지요? 눈 밝은 이의 뒤를 따라가면 저절로 오아시스에 이를 수 있겠거니 했지만, 모래 먼지 불어오는 벌판에서 그만 방향을 잃었다는 말씀에 가슴이 아렸습니다. 어지간해서는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저를 찾아오신 것은 그 무거운 마음을 어딘가에 부려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정현종 선생은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어디 나를 두고 오지도 못하고/이 고생이구나” 하고 노래했습니다. 그 심정 이해가 되지 않나요? 고래 힘줄보다 질긴 ‘나’를 ‘나’로부터 분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나를 떠나면/두루 하늘이고/사랑이고/자유인 것을”. 이게 쉬운 일이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일도 없었을 겁니다. 삶이란 어쩌면 끊임없이 ‘작은 나’와 결별하고 ‘참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자기 스승 유영모 선생님의 글을 참고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지 마라

참참이 참아가서 영원한 참 갈 것이니

참든 맘 참 참을 보면 가득 참을 얻으리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손에 쥐어주시는 노잣돈 같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참을 찾는 이들은 꾸준해야 하고,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참든 맘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참을 찾는 과정임을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결과에만 집착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합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이 하신다”(잠언 16:1)고 가르칩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이 말씀을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변수가 생겨서 계획이 어그러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스스로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일이 순조롭지 않을 때 절망감을 크게 느낍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돕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이해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영적인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일반적 태도입니다. 영적인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이들은 온 우주가 나서서 자기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노합니다. 그 탓을 다른 이들에게서 찾습니다. 모색하고 대화하고 설득하려는 노력은 포기한 채 상대를 굴복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만든 혹은 타자들이 자기에게 부여한 이미지에 갇힌 채 살아갑니다. 자기는 근사한 사람이고 홀로 올바른 사람입니다.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직 자기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린아이를 꾸짖듯 주위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함께 대화해야 할 사람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함께 일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그의 고립은 심화되고 주위에는 아첨꾼들만 남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잠시나마 고독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성찰의 능력은 ‘홀로 있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잠시 물러나서 본연의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됐나?” 하는 자기 연민으로부터도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의 허상을 대면한다는 것은 늘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 허상이 무너지지 않으면 참된 자기와 만날 기회는 그만큼 줄어듭니다. 실패는 늘 쓰라리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면 크게 낙심할 일은 아닙니다. ‘광야’는 바로 그런 ‘홀로 있음’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일쑤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든, 어쩔 수 없이 쫓겨 들어간 것이든 광야는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주조하는 용광로였습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엘리야가 그러했습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테오도르 모노는 사막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사막은 또한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한 사람에게 하루 2.5ℓ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 저녁은 전설, 이야기, 웃음 가득한 밤샘으로 이어진다. 나머지 시간은 명상과 정신 수양으로 보낸다. 두뇌는 오직 한 곳을 향하고, 드디어 우리는 하찮은 일, 쓸데없는 것들, 수다스러움에서 벗어난다.”(테오도르 모노, 《사막의 순례자》, 현암사, 71-72쪽)

 

사막은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사막 혹은 광야는 우리의 의식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허장성세를 물리치게 해줍니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차이를 몸으로 체험하게 해줍니다. ‘없이 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삶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막에 머물러 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영 쑥스럽군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광야가 반드시 특정한 장소를 일컫는 말이 아님을 아시지요?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지레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일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립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거두는 성공이 실은 실패이고, 하나님을 뜻을 따르느라 겪게 되는 실패가 실패가 아님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장엄한 일입니다. 어떤 성공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어떤 실패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제 헤어진 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화자인 ‘나’와 조르바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벌목 사업이 무참하게 실패로 끝나는 장면을 펼쳤습니다. 둘은 인부들이 벌목한 나무를 해변으로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을 구상했습니다. 그래서 케이블이 달린 구조물을 만들고 통나무를 그리로 내려 보내려 했습니다. 첫 번째 통나무를 달아 내리자 구조물 전체가 흔들렸고 케이블에 매달렸던 통나무는 통숯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통나무는 철탑까지 무너뜨렸습니다.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다 혼비백산하여 도망갔고 해변에는 조르바와 ‘나’만 남았습니다. 그들의 전 재산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조르바는 태연자약합니다. 나이프를 들어 양고기를 베어 먹고 술도 가져다가 마셨습니다. ‘나’도 그 만찬에 동참했습니다. 술잔을 부딪치고 토끼피보다 붉은 크레타의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애착하고 있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상실감 못지않게 홀가분함이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 느낌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혈관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가슴은 선한 마음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양이었던 사람은 사자가 되었다. 인생의 슬픔은 잊히고 고삐는 사라졌다. 짐승이고 하느님이고 인간과 화합하여 우주의 일부분이 되는 기분이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8년 3월 30일, p.417)

 

양이었던 사람이 사자가 되고, 우주의 일부분이 되는 느낌이 어떤 느낌일까요? 왠지 장쾌하지 않습니까? 애집하던 것이 스러질 때 우리도 그렇게 자유를 느낄 수 있을까요? 다음 순간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 합니다. 조르바는 해변에서 겅중겅중 춤을 춥니다.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날램, 긍정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그의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다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앞의 책, p.419)

 

몸치에다 박치이긴 합니다만 저도 이런 춤을 한번 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이 깊어갑니다. 부디 너무 많은 염려로 건강을 잃지 않으시기를 빕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되 결과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마세요. 만약 기획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다소 쓰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 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너무 쾌재를 부르지는 마십시오. 그것조차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시절 인연이려니 여기고 오늘을 기뻐하며 사십시오.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제가 곁에 있음을 기억해주십시오. 다시 한 번 평안의 인사를 올립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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