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51)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잘 지내시지요?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영상을 보니 여전히 분주하시더군요. 기타를 치거나 하모니카를 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멋지구나’ 감탄하곤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잡기에 능했다고 눙치곤 하지만 실은 피나는 훈련의 결과임을 잘 압니다. 물론 좋아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요.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서 마을 공동체 운동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조금 걱정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황무지에 서듯 아무런 대책도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다가 눈길에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을 때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마을 사업을 지속하는 것을 보고 존경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에 불어닥친 초기 자본주의의 물결을 불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마을이 세계를 살린다'고 말했지요. 수공업적인 노동을 통해 지구적으로 자본화되는 세상에 맞서자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무모해 보였겠지만 그의 제안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오래된 미래’라 할 수 있는 혜안으로 여겨집니다. 조한혜정 선생님의 《다시, 마을이다》에 나오는 한 대목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근대는 ‘마을을 버린 사람들’에서 시작해서 ‘마을을 만드는 사람들’로 끝이 날 것이다.” 비록 깊이 이해한다고 할 수 없지만 이 말 속에 미래의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외길로 몰아넣습니다. 그 길은 갈수록 좁아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숨은 가빠지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습니다. 느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칼하인츠 A. 가이슬러가 《시간》이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열심히 소비해야 한다. 일에 열광하는 그런 삶에서는 시간이 남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시간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면 자유로운 시간을 의미 있게 활용할 줄 모르게 되며 시간이 있는데도 시간이 없다고 주장한다”(칼하인츠 A. 가이슬러, 《시간》, 박계수 옮김, 1999년 1월 20일, p.61).

 

분주함이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기호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여유로움은 게으름과 등치되곤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사람들은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뭔지 모를 조바심에 쫓기고, 자기를 닦달합니다. 안달뱅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너그러울 수 없습니다. 제도로서의 자유는 확대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적인 자유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본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적응하며 사는 동안 사람들은 점점 노예적 존재로 변모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상상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말도 했습니다. 자본주의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노동뿐만 아니라 출산이나 결혼, 장례까지도 아웃소싱하는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우상은 '돈'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탈영토화를 단행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사회복지사가 되려 했던 때의 결심과 달리 자꾸만 문제를 풀어가는 기능인으로 전락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 예민한 자기 성찰이 가능했던 것은 그 일을 밥벌이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들은 대개 그런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밥벌이의 지겨움' 운운 하면서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커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욕망에 몰두합니다.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박노해 선생의 사진 에세이집인 《다른 길》 서문은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두어 대목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시대의 끝간 데까지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체제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앞선 과거’로 돌아 나오고자 하는 기나긴 유랑길이었다.”

 

“막막함과 불안과 떨림의 날들. 난 모른다. 언제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난 모른다.

길을 잃어버리자,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그 땅의 사람들이

나의 살아있는 지도였고 나의 길라잡이였다.”

 

(박노해, 《다른 길》, 느린걸음, 2014년 2월 1일, p.6-7)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길을 잃어버린 줄을 설사 깨닫는다고 해도 대개는 내친 걸음 포기할 수 없어 가던 길을 계속 가곤 합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지도를 포기하고 마음 속 '별의 지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고,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길이 그를 찾아왔고, 그는 마침내 오래된 부름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부럽습니다. 그 홀가분한 떠남이. 우리가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가진 것이 많아서 일 겁니다.

 

마을 운동을 시작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마을 주민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것이었다고 하셨지요? 늘 관계기관에 뭔가를 요구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일에 발밭은 이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마을 일을 풀어갈 의사도 능력도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분들과 지속적으로 만나고 조언을 구하자 한분 두 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지요? 사랑과 인내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 이야기를 하던 중, EBS 지식채널에서 보았다며 들려준 늑대 무리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무리 내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우두머리 늑대가 개입을 하는데, 제압의 방법은 '폭력'이 아니라 '장난'이었다지요? 힘이 더 세 보이는 늑대에게 장난을 걸어 그 늑대로 하여금 동료에게 보였던 공격성을 잊게 함으로 늑대 무리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부분을 조금 둥글게 바꾸는데 유머만한 게 없지요. 그래서 그렇게 늘 웃으시는 거였군요. 마을 주민들이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마을 공동체가 든든히 서기 시작했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니 참 반가운 일입니다.

 

내게 무엇보다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창작 본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예술이라는 것은 특정한 엘리트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 왔습니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서 감상하는 정도로 만족해왔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작품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표현해본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바로 그런 노작 과정은 알게 모르게 마음을 닦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거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질수록 사람은 외적 조건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일수록 외적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일에 열중합니다. 장신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함에 집착하는 이들도 내적으로 빈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을 운동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이 형성되는 것이라 하셨지요?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생의 위기가 닥쳐올 때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소속에의 욕구’는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가요? 사람들은 참 다양한 모임에 소속된 채 살아갑니다. 향우회, 동창회, 동호회, 학부모회, 전우회, 계 모임…. 길거리로 내몰린 이들의 경우 그러한 관계의 그물망에서 거의 완벽하게 소외되더군요. 일상적 삶으로 복귀하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다양한 관계로부터 격절된 이들의 벗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일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SNS에 쓴 글을 보았습니다. 자기 개인의 아픔에 대해 말하면 은혜스럽다고 하고 세월호 참사나 비정규직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아픔에 대해 말하면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누구나 느끼는 현실입니다. 사사화된 신앙의 문제는 어제와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둥이 기울고 서까래가 삭은 오늘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래 전 홍천의 작은 시골 교회를 담임하던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는 자기 교회에 걸린 십자가의 내력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보니 가로수의 지지대 혹은 버팀목으로 사용되던 나무가 바닥에 버려져 있더랍니다. 가로수의 뿌리가 깊어져 더 이상 버팀목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지요. 선배는 그 버림받은 버팀목을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져다가 십자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주다가 필요가 사라지면 버려지기도 하는 것이야말로 십자가 정신이 아니겠냐는 것이지요?

 

마을 살리기 운동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길 위에서 낙심하지 않고 버텨주어 고맙습니다. 언제든 필요하면 도울 수 있는 길을 찾겠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작은 마을들이 되살아날 때 잃어버렸던 정도 회복될 것이고, 해체되었던 관계망도 복구될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일인 동시에 주님의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르는 곳마다 식탁공동체를 이루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앞서나가고 계십니다. 불통의 세상을 소통의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하는 노력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깊어가는 겨울,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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