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1)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평안하신지요?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사위가 고요합니다.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니 불이 밝혀진 집이 많지 않습니다. 혼곤한 잠에 빠져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왠지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기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착한 잠을 자고 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웃으시겠지만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은 김기택 시인의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라는 시를 읽은 후부터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니요? 늦장가를 간 시인은 선물처럼 자기 가정에 찾아온 아기를 보면서 신비가가 된 것일까요? 시인은 달게 자고 난 아기가 마치 하룻밤에 이 세상을 다 살아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 사이 훌쩍 자란 풀잎 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 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아기의 목구멍에서 굴러 나와 아침 공기를 낭랑하게 울린다.”

 

,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라는 구절이 마치 아득한 시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 그런 잠을 누렸던가요? 자고 일어나도 늘 찌뿌드드한 것은 비워야 할 잠을 말끔히 비우지 못한 때문임을 알겠습니다. 비워야 할 것을 비우지 못하는 것은 묵은 때처럼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염려와 근심 때문일까요? 시간 속을 바장이는 동안 우리 속은 이미 까맣게 타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하나 둘 아파트 창문에 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밝음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기 전, 이 잿빛 시간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성탄절이 지났습니다. 일 년 내내 죽음이 예기되는 땅에서 살아온 이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저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직 애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이 땅 곳곳에 배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습니다. 나와 무관하다 하여 참담한 현실을 외면해 버리지 않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일 겁니다.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노래하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우리는 비명소리를 듣습니다. 자기 안위를 위해 무고한 영아들을 학살한 헤롯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생활고를 비관한 한 가장이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부당 해고에 맞서기 위해 오체투지로 겨울 거리를 달구다가 방패 앞에서 멈춰선 이들도 있습니다. 굴뚝이나 전광판에 올라 함께 살고 싶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고 있는 밀양이나 강정 사람들, 그리고 골프장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산하의 피울음도 헤롯의 시간이 빚어내는 살풍경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끔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 질문 속에 담긴 좌절과 무기력이 느껴져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우리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루쉰은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으면서 생긴다고 했지요? 옳은 말입니다. 희망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정글도를 들고 덩굴숲을 헤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마치 베어진 풀과 나무의 상처에서 피어나는 상큼한 향을 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길을 만드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일까요? 얼음을 깨고 나가는 쇄빙선이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쩡쩡 갈라지는 얼음의 파열음이 들리는 듯 합니다. 희망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관념의 감옥에서 벗어나 실천의 벌판에 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실천의 벌판이 꼭 투쟁의 자리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갈라진 세상을 고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희망을 일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2이사야는 그의 백성들이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눠 주고,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고,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을 때에 이 땅에 비쳐 올 빛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이사야 58:7) .

 

빛 혹은 희망이 어떻게 도래하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켜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하네요. 이 마음으로 살아야겠지요? 모색하고, 돌진하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세상을 고친다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보다 내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지금의 유대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 이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목표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곤고함은 사람들의 시선을 좁아지게 만듭니다. 자기 욕망 주위를 맴도는 동안 점점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먼 데를 바라볼 수 있는 여백만 있어도 눈앞의 일 때문에 시난고난 애끓이지는 않을 겁니다.

 

보들레르는 아름다운 암고양이 펠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을, 공간처럼 무한하고 엄숙한 시간을, 분으로도 초로도 나누어지지 않은시계 위에도 표시되지 않은 정지된 시간을, 그러나 한숨처럼 가볍고, 깜빡이는 일별처럼 재빠른 시간을.”

 

훼방꾼이 나타나서 너는 시간을 읽느냐?” 하고 물으면 그렇다, 나는 시간을 읽고 있다. 시간은 지금 영원이다!”라고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16 시계중에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 속에서 시간을 볼 수 있다면, 분초 단위로 우리를 몰아대는 시간의 폭력에 맞설 수 있을 겁니다.

 

객적은 말이 많았습니다. 투덜거려도 웃음 띤 얼굴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핑계삼아 부끄러운 속내를 드러내 본 것입니다. 눈 내린 산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습니다. 후줄근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찬 기운을 한껏 들이마시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외치든 메아리처럼 응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올 한 해 내내 하나의 중심을 향한 여정이 흥에 겨우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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