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저장소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50)

 

의미의 저장소

 

잘 지내고 있지요?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습니다. 세계의 여러 공동체를 경험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그 장한 결정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쉽지 않은 일에 지치지나 않을지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늘 밝고 유쾌하게 현실과 대면하는 성정을 아는지라 잘 해내리라 생각했습니다. 벌써 여러 달이 흘렀네요. 캐나다의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이제 내게도 친밀한 곳이 되었습니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그곳에 머물던 사람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겨울의 전령이 그곳에도 다녀갔다지요? 이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엊그제 첫눈이 내렸습니다. 모처럼 마음이 동해 사무실 식구들과 함께 북한산 자락을 걸었습니다. 흰눈을 이고 있는 풀과 나무를 보며 모두 즐거워하더군요. 나는 유난히 겨울산을 좋아하는데, 계곡 사이로 불어오는 칼칼한 바람조차 싱그럽게 느껴졌습니다.

 

여기는 아무리 추워도 영하 20도까지는 내려가지 않는데, 그곳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지요?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사막화 방지를 위한 숲 조성 문제 때문에 몽골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10월 초였는데 이미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인도에서 사람이 불쑥 솟아나오는 장면을 보고 놀랐습니다. 몽골 청년에게 물어보니 집 없는 사람들이 혹독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 난방용 파이프가 지나는 지하에서 살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아주 많다고 들었습니다. 영하 40도 아래로 떨어지는 날이 많은 겨울철에 가축들이 폐사하는 일이 많다더군요.

 

캐나다도 1-2월이면 그 정도로 추운 지역이 많다니 놀랍습니다. 이번 겨울에 몇 번 거처를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구요? 하필이면 공동체의 분립을 왜 겨울에 하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모두 즐겁게 준비를 하고 있다니 잘 되겠지요. 이제는 공동체 식구들과 더불어 나누는 이야기가 꽤 깊어지셨더군요. “왜 이런 여정에 접어들게 되었어요?” 하고 묻는 그들에게 대답할 말을 찾다보면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곤혹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에 대해서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구요? 선가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회광반조 조고각하(廻光返照 照顧脚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광반조란 자기를 돌아보아 심성을 밝게 한다는 뜻이고, 조고각하란 발 밑을 살핀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실 기독교의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그런 것들이 온통 가려지고 말았을 뿐이지요. 잘 살펴보면 우리가 거두어들여야 할 아름다운 열매들이 참 많습니다. 순교자들이 많았던 후터라이트 공동체 사람들에게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당하거나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한국교회 선각자들의 이야기는 아마도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겁니다.

 

<후터라이트 연대기>에는 약 2,000명 정도의 순교자들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구요? 그들은 기록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기억을 허비하지 않았군요. 기억을 박제해놓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읽어가면서 과거와 현재가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이겠지요. 해방신학자인 호세 세베리노 끄로아토(Jose Severino Croatto)는 출애굽사건이나 예수사건 등을 ‘의미의 저장소’(reservoir of meaning)라고 명명했습니다. 후터라이트 공동체 사람들에게 ‘연대기’가 바로 의미의 저장소이겠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현재를 자꾸만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인 동시에 그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일 겁니다.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의미를 형성해 나간다는 것처럼 소중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한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 땅을 밝히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한국교회에 드리운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그분들의 뜨거운 영혼과 접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 김수영은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 중에서)고 노래했습니다. 시인의 절절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진창 같은 역사라도 우리 역사로 수용해야지요.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일일 겁니다. 특히 어두운 역사를 밝히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불쏘시개로 내놓은 기독교의 선각자들과 자꾸 만나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삶을 통해 영혼의 성좌를 이룬 이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후터라이트 공동체의 일상적 예배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습니다. 매일 저녁 5시 30분이면 종소리가 울리고, 모든 공동체 식구들이 교회에 모여 각자의 지정석에 앉는다지요? 목사들과 공동체의 리더들이 회중을 바라보며 맨 앞자리에 앉고, 좌측에는 남자들이 그리고 우측에는 여자들이 나이 순서대로 앉는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5살부터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어 맨 앞줄에는 꼬마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앞을 응시한다구요? 어린이들조차 예배의 소중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서 목사가 찬송가의 가사 한 줄을 낭독하고 회중들은 낭독된 가사를 합창하는 것은 책이 귀하고 문맹률도 높았던 시기에 생긴 전통을 계승한 것이겠지요. 그런 이중적 과정 때문에 가사를 깊이 음미하게 되고, 책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들이나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설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설교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교집에서 선택한 설교를 낭독한다지요. 매주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이 땅의 설교자들이 들으면 귀가 번쩍 뜨일 이야기입니다. 설교 표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엉뚱한 일에 마음이 팔려서 설교를 충실히 준비하지 않는 게으른 목회자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스스로 준비한 설교를 하기보다는 옛 설교집에 나오는 설교를 낭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니 놀랍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설교가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대면시키는 행위임을 생각할 때 옛 설교집을 낭독하는 설교가 시의적절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저는 꽤 오래 전부터 개신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예배 혹은 전례(典禮)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애 주기에 따른 공동 기도문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약점이라 생각합니다. 전례는 그리스어 ‘leitourgia’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liturgia’가 되었습니다. 레이투르기아는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laos’와 ‘일’을 뜻하는 ‘에르곤ergon’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전례는 ‘백성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라오스는 모세로 인해 야훼의 법을 받은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콰할quhal’의 그리스어 번역입니다. 이들은 법 안의 백성인 셈이지요. 신약에서 라오스에 대비되는 단어는 ‘오클로스oklos’입니다. 그들은 법 안에 살고 있지만 법 밖의 존재로 간주된 자들입니다. 민중신학은 예수운동이 ‘오클로스’와 함께 하는 운동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 운동이 라오스를 배제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가기는 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기독교인들의 내면 속에 각인되기 위해서는 ‘반복’이 필수적입니다. 후터라이트 전례로부터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배가 끝났다고 선포하면 뒷줄에 앉아 있던 연장자들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퇴장한다지요? 그 것은 박해시기에 교회 문을 먼저 나서는 사람들이 먼저 잡혀갔기 때문에 생긴 전통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공동체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어른들의 뜨거운 마음이야말로 공동체의 가장 귀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사회이든 어른의 권위는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마음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지요. 스스로 어른입네 하면서 터무니없는 권위의식으로 주변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큰 방 안에 의자들만 휑뎅그렁하게 놓여있는 후터라이트 교회는 어쩌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단출함 속에서 오히려 경건한 영성이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물녘부터 도시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붉은색 십자가 네온을 보면서 무덤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질책이 숨어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진력해야 합니다. 괜히 고리삭은 노인처럼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삭연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일수록 따뜻한 바람이 되어 사람들을 감싸 안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작정하고 떠난 길이니 가슴 가득 그런 바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운 겨울, 건강에 유의하시고 유쾌한 웃음으로 공동체의 벗들에게 봄소식이 되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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