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부르는 노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46)

 

나무가 부르는 노래

 

 

평안하신지요?

 

간밤에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베란다 창문이 좀 열려 있었나 봅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시원하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내리는 단비였습니다. 충남에서는 물 부족으로 제한 급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현지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인데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고 그 심각성을 깊이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을까요? 가만히 어두운 창가에 서서 바람이 휘젓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물끄러미.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잠시 나무를 흔들다가 놓아주곤 하는 바람, 바람이 부는 대로 자유롭게 춤을 추는 나뭇잎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목사님께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커짐을 문득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말과 더불어 보내온 노래 <나무가 부르는 노래>(나무엔 작사, 작곡) 말입니다.

 

“바람이 불기 전에는 나무가 노래할 줄 몰랐다

저 멀리 푸르른 나무들 그 바람을 아는 듯 설레어 하네

바람이 나무를 노래하네 오랜 기다림을 노래하네

그 노래 나무가 부르는 노래 바람과 함께 부르는 노래

바람이 불기도 전에 나무가 설레어 하네”

 

담백하고 맑고 착한 소리가 제 귀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맛은 담담한 맛이라지요? 자극적인 소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영혼은 꾸밈없이 부르는 님의 소리에 가장 크게 공명하곤 했습니다. 그 소리는 내가 겹겹이 입고 있던 허위의 옷을 벗게 만듭니다. 느슨하게 늘어져 있는 내 마음의 현을 조율해주는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바람은 나무를 통해 노래하고, 나무는 바람 덕분에 노래를 부릅니다. 이 아름다운 어울림이 참 좋습니다. 혹시 함석헌 선생님의 <인생은 갈대>라는 시를 아시는지요? 그 일부만이라도 소개하고 싶군요.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내리어

파린 몸 빈 마음에 찬 물결 밟고 서서

한 세상 쓰고 단 맛이 좋고나 하는 듯”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하느작거리는 갈대 혹은 억새를 보며 사람들은 다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꽃도 지고 잎도 다 떨어진 마른 갈대를 보고 있습니다. 화려한 시절은 다 지나갔습니다. 자아를 부풀게 했던 것들이 다 스러지자 마음조차 가난해졌습니다. 찬 물결 밟고 서 있지만 서럽지는 않습니다. 젊은 때는 쓴 맛과 단 맛을 가렸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자기 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순하게 그 생을 마음으로 보듬어 안습니다.

 

“인생은 꺾인 갈대 한 토막 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가득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아무리 몸부림쳐 보아도 인생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안간힘을 다해 하늘을 지향해 보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그래서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꺽인 갈대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닙니다. 시인은 꺾인 갈대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습니다. 그렇지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불멸을 노래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봉 구름 위에 가득한 숨을 한껏 들여 마시고는 뚫린 피리 속에 숨을 불어넣습니다. 그 숨은 나의 숨인 동시에 너의 숨이고, 더 나아가 절대적인 님의 숨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영을 '숨' 혹은 '바람'이라 하지 않던가요? 그렇기에 시인은 얕은 숨이 아니라 높은 봉우리 저 구름 위에 가득한 숨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노래하는 마음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제 숨에 맞게 노래를 잠시 부르다 가는 것이겠지요.

 

오늘 저는 금혼식을 맞이한 한 노부부의 잔치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축시를 낭독하신 분이 “쉰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살아냈다”며 두 분의 삶을 치하했습니다. 그렇지요.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세월을 겪었을 겁니다. 기쁜 순간도 있었겠지만, 가슴이 무너지는 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순간을 함께 겪어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요. 사회자가 가족들과 친지들을 소개할 때 나는 나희덕의 시 <품>을 떠올렸습니다. ‘세상에!’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는 오동나무 한 그루에 까치가 이십 마리나 앉아있다고 노래합니다. 그 나무는 크기는 했지만 반 넘어 썩어가는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도

물기로 출렁이던 때

제 잎으로만 무성하던 때 있었으리.”

 

시인은 그 나무를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냅니다. 지금은 구새 먹어 볼품없게 되었지만 그 나무도 푸른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섯 번을 잘리면서도 기어코 줄기를 뻗어 올리던 시기, 삶의 의욕이 넘치던 때 말입니다(오동나무는 다섯 번을 잘라준 후에 나오는 줄기라야 아름다운 소리를 품은 악기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하지요). 시인은 제 잎만으로도 무성하던 나무의 한 때를 떠올립니다. 청년의 날입니다. 하지만 그 푸르던 시간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소리를 품은 악기로 변화될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눈여겨보는 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외로운 오동나무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까치떼입니다. 시인은 그 기적과도 같은 풍경을 보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빈 가지가 있어야지,

제 몸에 누구를 앉히는 일

저 아닌 무엇으로도 풍성해지는 일.”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누군가를 앉힐 수 없다네요. 옳은 말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은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 아닌 무엇으로 풍성해지는 일’입니다. 이런 삶의 비결을 익힐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이 인정의 황무지는 되지 않을 텐데요.

 

지금은 어둠이 소리없이 찾아오는 시간입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니 괜히 쓸쓸한 생각이 드네요. 서가에서 빛바랜 시집 하나를 꺼냈습니다. 게오르그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의 《귀향자의 노래》입니다. 이 시집과 만난 게 벌써 사십 년 전이니 저와 꽤 오랫동안 지냈습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가 세월을 느끼게 해줍니다. 가끔 이런 시집을 읽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을라치면 아내는 얼른 치우라고 다그치곤 합니다. 그 가혹했던 시절의 우울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그의 시와 만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겨우 스물 일곱 해를 살다가 떠난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인식이 마치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어 곳곳에서 나는 순수한 세계에 당도하고 싶은 열망과 동시에 소멸에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도저한 허무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찬란한 빛은 흘러가고

저무는 저녁의 얼룩진 다청색.

목동의 고운 피리소리도 사라졌다.

저무는 저녁의 얼룩진 다청색.

그날의 찬란한 빛은 흘러가 없다.”

 

(게오르그 트라클, 《歸鄕者의 노래》 중 <回旋曲>, 손재준 역주, 민음사, 세계시인선34, 1975년 8월 20일, p.49)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의 찬란한 빛은 흘러갔습니다. 저물녘의 다청색도 얼룩져 있습니다. 쓸쓸합니다. 1차 세계 대전의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그는 이미 늙어버렸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씩씩한 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힘이 좀 빠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죄짓는 일에 그렇게 유능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서없는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제 넋두리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 님이 부르신 <욥의 기도>를 다시 들어보려 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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