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45)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어제의 만남은 참 유익했습니다. 함께 오신 재즈 뮤지션 덕분에 대화가 더 유쾌했던 것 같습니다. 재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런저런 일로 들떴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애집하고 있던 일로부터 조금은 거리를 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쿠바 출신 할배들이 만들어내는 그 조화롭고 자유로운 소리에 매혹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이란 너무 엄숙한 것도 비극적인 것도 아니라고, 순간순간 다가오는 기쁨과 슬픔을 한껏 맛보면서 즐겁게 견뎌내는 거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어쩌면 아직 정오 무렵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 세계관일 겁니다. 하지만 오후 4시에서 5시 어간을 지나고 있는 내게는 그 할배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있습니다.

 

메일을 통해 청년 모임의 강연 부탁을 받았을 때 늘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청년들의 절박한 심정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청년 세대를 가리켜 ‘망연자실할 법한 인생의 노도 앞에서 신음하는 이들’이라 하셨지요? 그러니 그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오후 5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정오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저 ‘꼰대’(?)스런 말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 생동하며 행동하라는 초대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 한 켠에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생동하는 삶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메시지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적 신앙과 역사적 신앙의 균형과 긴장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의 삶임을 재확인시켜 달라는 요구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있다면 ‘길들여진 젊음’일 겁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하구에 모여들어 끼룩거리며 파도에 떠밀려온 물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다툴 때, 홀로 높이 그리고 빠르게 날기 위해 훈련을 계속하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모습은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선 나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앞머리에 나오는 “우리들 속에함께 살고 있는 진정한 조나단 시걸에게”라는 헌사는 비근한 일상을 넘어선 세계로의 초대였습니다. 비행 훈련으로 깃털조차 다 빠져 앙상하게 마른 조나단의 모습은 사막의 수도자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동료 갈매기들은 갈매기의 전통과 법규를 따라 살지 않는 조나단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세계에서 추방했습니다. 추방은 쓰라린 것이지만 '홀로'된 바로 그 때 조나단은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노니는 다른 갈매기들을 만납니다. 그 갈매기와의 만남을 통해 조나단도 시공을 넘어 비행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됩니다만 이 정도로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조나단이 동료 갈매기들을 그 놀라운 세계로 인도하려 하지만 다수의 갈매기들은 여전히 그를 갈매기 세계를 분열시키는 위험 인물로 여겼다는 말만 해야 하겠습니다. 《갈매기의 꿈》은 어쩌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처드 바크는 ‘어느 메시아의 모험’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환상》의 책머리에 《갈매기의 꿈》에서 엿보았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청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거대하고 맑은 강물 밑바닥에 군생이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강물은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가난한 자, 착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그들 모두 위에 조용히 흘렀습니다. 생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강바닥의 바위와 나뭇가지에 꽉 매달려 있었습니다. 매달리는 것이 그들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매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한 생물이 다른 생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꼭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물론 강물은 그를 넘어뜨려 바위 위에 내던졌지요. 그 생물은 다시 매달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흐름은 그를 밑바닥으로부터 들어 올려 자유롭게 했습니다. 다시는 멍들거나 다치지도 않게 되었지요. 이방으로부터 온 하류의 군생들이 그를 보고 외쳤습니다. “기적을 보라! 우리와 똑같은 생물이지만 그는 날고 있다! 메시아를 보라! 오셔서 우리 모두를 구하소서!” 강물 위를 떠내려가던 자는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며 저마다 잡았던 손을 놓기만 하면 강물은 즐거이 우리를 들어 올려 자유롭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바위에 매달린 채 ‘구세주여!’라고 외치기만 했습니다. 그 생물은 흐름을 타고 사라졌고 남은 이들은 자기들끼리 구세주의 전설을 만들었습니다(리처드 바크, 《환상》, 신정옥 옮김, 평민사, 1980년 12월 1일, p.13-45쪽 참조)

 

매달리기만 할 뿐 손을 놓을 용기가 없어 사람들은 신화를 만들고, 그 신화를 소비하고 해석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익숙하던 세계를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구름에 달 가듯이’ 떠도는 나그네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초대였습니다. 등불을 꺼야 밤하늘의 별세계가 오롯이 드러나듯 내게 편안함을 주는 세계로부터 자꾸 떠날 때 더 큰 세계가 우리 눈앞에 개시됩니다. 자기가 통제할 수도, 조작할 수도 없는 세계의 현전! 그 세계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 경도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욕망의 터 위에 세워진 세상은 우리가 서 있는 삶의 길에서 벗어나면 다시는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질 거라고 위협합니다. 그래서 다른 세계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말이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눈 옆으로 가리개를 씌워놓은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꼴이 꼭 그런 것 같습니다. 학생들에게는 한눈을 파는 순간 네 친구가 너를 앞지를 거라고 가르치고, 직장인들에게는 방심하는 순간 루저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 그들을 길들이려 합니다. 많은 이들이 투덜거리면서도 그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당연의 세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은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

 

경쟁을 내면화한 채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은 사람들을 모두 환자로 만듭니다. 자기 고유의 속도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가 정해놓은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하니 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 이야기를 잘 압니다. 그는 밭에 심어놓은 보리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 날마다 밭으로 달려가 살펴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너무 더디 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보리 한 포기를 살짝 들어 올렸더니 키가 한결 커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종일 보리 키를 키워주느라 땀을 흘렸습니다. 자기 노동의 결과를 바라보며 그는 흐뭇해 했겠지요. 하지만 며칠 후 그가 맞닥뜨린 것은 누렇게 죽어버린 보리밭이었습니다.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발묘조장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자기 인생의 때에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기성세대의 욕망에 따라 경쟁의 세계로 내몰리는 이들의 마음이 건강할 리가 없습니다.

 

힐링 열풍이 지금은 조금 시들하기는 합니다만, 용어의 소비가 줄었을 뿐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심리상담사들의 전성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목회자들 가운데도 목회상담을 마치 미래 목회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인식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람들을 환자로 만드는 사회 구조는 그대로 놔두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환자들을 치유만 해주면 되는 것일까요? 법인 스님의 책을 읽다가 공감되는 대목을 만났습니다. 그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무지와 게으름, 그리고 비겁이 그것입니다. 물론 사회 구조도 한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사회는 속도와 성장을 목표로 개인을 도구화하고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국가권력과 기업과 학교"입니다. 법인은 “어설픈 위로는 개인을 나약하게 만들고 탐욕과 독점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사회구조에 면죄부를 준다”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아프다고, 괴롭다고 말하는 이들이여, 위로받기 전에 냉엄하게 스스로를 진단해 보라. 내 삶은 방향을 제대로 잡았는가, 나는 지금 남의 삶을 눈치 보며 흉내 내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된다”(법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불광출판사, 2015년 3월 20일, p.21)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존 질서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실에 길들여질까 두렵다고 하셨지요? 그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듭거듭 들어야 하는 것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우렁우렁한 요구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내려놓지 못해 누추해진 이들을 우리는 정말 많이 봅니다. 노자는 일찍이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를 가르쳤습니다. 공을 이루어도 그 속에 머물지 말라는 말입니다. 치기만만하던 시절 나의 진실이 왜곡되거나 짓눌릴 위협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되뇌던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죽지 뭐!’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건 나름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견결했던 그 마음이 나를 지켜주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무슨 광고 카피 같긴 합니다만 이런 정도의 결기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찬 바람에 하나둘 떨어지는 낙엽을 봅니다. ‘放下着.’ 때가 되면 홀가분하게 떠나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가을의 남은 때를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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