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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by 한종호 2015. 10. 25.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7)

 

도적질하지 말라

-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 -

 

 

단순히 유괴하지 말라는 계명인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뜻이 분명해서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토록 당연한 걸 굳이 계명으로 삼아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계명을 세 번만 소리 내서 읽으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무엇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뜻인가? 이 계명에는 목적어가 없다! 아무리 십계명이 법정에서 사용되는 법률이 아니라 해도 그렇지, 적어도 도둑질의 목적어는 있어야 하지 않나! 안 그런가?

 

본래 이 계명은 유괴하지 말라는 뜻이었단다. ‘사람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을 유괴한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는 출애굽기 21장 16절과 “어떤 사람이 같은 겨레인 이스라엘 사람을 유괴하여 노예로 부리거나 판 것이 드러나거든 그 유괴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그러한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신명기 24장 7절이 그런 해석의 근거다. 하지만 계명의 범위를 유괴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목적어가 없으니 도둑질할만한 모든 것에 계명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해석의 여지를 넓게 열어놨다는 얘기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4:28)라고 권한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이므로 그가 기대한 독자는 당연히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었다. 바울은 그들 중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물론 단순히 교인들에게 자기 손으로 떳떳하게 일해서 벌고 그걸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 편지가 구체적인 수신인을 전제했음을 감안했을 때 후자였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도둑(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그가 어떤 종류의 도둑이었고 뭘 훔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흥미로운 점은, 바울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도둑(들)을 교회에서 내쫓지 않고 사랑으로 권고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어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이다.

 

바울은 ‘도적질’을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버는 일’과 대조한 후 그걸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과 관련시킨다. 여기에 비춰보면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금지명령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자세와 원칙으로 노동할 것인지(“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와 노동의 결과로 얻은 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까지 의미한다고 봐야겠다.

 

 

 

다양해진 도둑질 유형

 

최근에는 도둑질 유형과 훔치는 물건 종류가 전보다 훨씬 다양해져서 과거엔 생각도 못했던 것까지 개인 또는 집단의 소유로 보호받고 있다. ‘지적소유권’이 대표적인 보기다. 지금은 지식과 아이디어도 법절차를 거쳐 개인 또는 집단의 소유로 등록하면 함부로 갖다 쓸 수 없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거의 오백 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도둑질은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기술이다. 만일 세상의 모든 도둑이 처형대에 달린다면 세상은 곧 텅 빌 것이고 처형을 집행할 사람조차 모자라게 될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지만 루터 눈엔 세상에 도둑 아닌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전통적인 의미의 도둑질만 염두에 뒀다면 상황을 이 정도로 과장하진 않았을 거다. 그는 미래엔 도둑질이 더 다양해질 걸 내다봤던 것 같다.

 

도둑질은 곧 불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도둑질이 불법은 아니다. 모든 도둑질이 처벌받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법망을 빠져나가서 처벌받지 않는 도둑질도 있고 ‘합법적인 도둑질’도 얼마든지 있다. ‘합법적인 도둑질’이란 말은 그 자체론 모순이다. 도둑질 자체가 불법이므로 거기에 '합법적'이란 말을 붙일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합법적인 도둑질’이 허다하다. 엄청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서 이른바 ‘절세’라는 방법으로 상속세를 적게 내고도 합법이라고 우긴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거다. 실제 가진 돈을 1백 원인데 그게 4백 원이나 5백 원인 것처럼 굴리다가(돈놀이) 세계경제를 망쳐놓고도 법적으론 아무 문제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특정 직업을 ‘합법적’인 도둑이나 ‘칼만 안 든’ 강도라고 불러온 지는 오래됐다. 이런 현실은 모든 도둑질이 불법은 아니고 또 합법이라 해서 도둑질이 아닌 건 아니라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에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걸 ‘도둑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내 걸 내가 가져가는데 그걸 어떻게 도둑질이라고 말할 수 있나?” 싶기 때문이다.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

 

학교 교장인 에바에겐 남편 스테판과 딸 마이카가 있다. 이 학교에 보이첵이라는 교사가 새로 왔는데 당시 열여섯 살 학생이던 마이카가 그와 사랑에 빠져 딸 아냐를 낳는다. 에바는 스캔들이 두려워 아냐를 자기 딸로 출생 신고한다. 엄마인 마이카는 법적으로 언니가 된 셈이다.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냐는 에바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마이카는 한 학기 남은 대학공부를 중단하고 아냐를 데리고 캐나다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아냐의 여권을 만들려면 에바의 서명이 필요하다. 에바가 엄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이카는 아냐를 유괴한다. 뒤늦게 에바가 사방으로 아냐를 찾지만 허탕치고 마이카는 아냐에게 사실은 자기가 엄마이고 에바는 할머니라고 말한다. 아냐는 “그럼 아빠는 누구야?”라고 묻는다. 그래서 마이카는 아냐를 보이첵에게 데려간다. 둘은 6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보이첵은 딸을 만나는 게 불편해 보이지만 아냐를 찾으려고 전화한 스테판에게 그들은 자기에게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한다. 그새 아냐는 잠들었고 마이카와 보이첵은 지난 일을 얘기한다. 마이카는 에바가 나오지도 않는 젖을 아냐에게 물리기까지 했다고 얘기한다. 그녀에게 아냐는 손녀 아닌 딸이었던 거다. 마이카는 에바에게 전화해서 자기가 엄마라는 사실을 법적으로 바로 잡고 아냐와 함께 살게 내버려두라고 요구한다. 이 통화 직후 마이카는 아냐에게 자길 엄마라고 부르라고 반복해서 시키지만 아냐는 그녀를 ‘마이카’라고 부른다.

 

아냐는 다시 잠들었고 보이첵은 마이카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한다. 아냐가 겪을 혼란을 생각하면 그게 최선이라는 거다. 마이카가 이에 동의하자 보이첵은 자동차를 빌리러 갔는데 그 사이에 마이카는 아냐를 데리고 보이첵의 집을 나온다. 애당초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녀는 다시 에바에게 전화해서 아냐의 여권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다시는 자기들을 볼 수 없을 거라고 협박한다. 하지만 에바는 망설이다 시간을 놓쳐버린다.

 

마이카 일행이 도시를 빠져나가려면 갈 곳은 기차역밖에 없다. 에바는 보이첵과 함께 그리로 갔고 마이카도 그들보다 먼저 거기로 갔지만 기차를 타려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마이카가 역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에바 일행이 도착해서 직원에게 마이카에 대해 묻는다. 직원은 그들이 두 시간 전에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아냐가 에바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들통 나고 만다. 에바는 아냐를 부둥켜안고 울고 마이카는 마침 역에 들어선 기차를 타고 혼자 떠난다.

 

도둑질,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는 죄악

 

영화를 보고나니 간단해 보이는 계명에 이런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가 있을 수 있나 싶어 소름끼칠 지경이다. 지금은 도둑질의 개념이 계명이 주어졌을 때와는 크게 달라졌다. 그때는 유괴나 남의 물건 훔치는 일, 저울을 속이거나 땅의 경계표를 옮겨놓는 일 등이 도둑질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도둑질의 종류가 많아졌다. 게다가 도둑질과 도둑질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따라서 오늘날 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더 많은 걸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재물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재물에 마음 쓰지 않을 수 있다. 재물 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듯 모으는 데 열중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모으기 전에 쓸 곳부터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해서는 극도로 절약하면서 남에게 아낌없이 쓰는 사람도 있다. 사람 성격이 다양한 만큼 재물 모으고 쓰는 모양도 다양하다.

 

재물에 대한 태도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각기 다른 태도를 갖고 산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인 이상 타고난 대로 살지 말고 도덕, 윤리, 신앙의 입장에서 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묻게 되어 있다. 타고난 성향과 도덕적 입장이 비슷하면 문제없겠지만 다를 때는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고 우리는 이 갈등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이 갈등은 건전한 것이다. 갈등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이 갈등이 건강한 게 되기 위해 재물에 대해 성서는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재물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성서는 재물에 대한 궁극적인 권리는 사람이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본래부터 내 것이란 없다는 얘기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것이다. 지금 내 소유로 등록되어 있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란 얘기다. 하느님이 잠시 내게 맡겨놓았을 뿐이고 은총으로 주셔서 잠시 누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재물에 대한 성서의 기본입장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따르지 않으면 된다. 믿을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으면 믿지 말고 동의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재물에 대한 성서의 기본입장을 바꿀 수는 없다. 성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시편 24편도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거기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도 주의 것이다.”라고 노래하지 않는가.

 

둘째로, 인간 존엄성과 노동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노동하게 만드셨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도 놀고먹지 않았다. 동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매일 노동했다. 사람은 누구나 노동의 대가를 기대한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노동엔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노동하고 그 대가를 누리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기도 하다. 사람이 존엄한 까닭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됐기 때문이고 노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이 노동한 대가를 훔치는 행위인 도둑질은 그의 존엄성을 해치는 중대한 범죄라고 하겠다.

 

노동의 존엄성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노동은 똑같이 존엄하다.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원수’(enemy)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원수’는 ‘이웃’ 또는 ‘동족’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원수가 누구인지는 문맥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원수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계명은 원수의 소유물일지라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너희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3:4-5).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을 챙긴다. 이긴 편이 패한 편의 군인, 가족, 무기, 동물 등을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율법은 원수의 소유도 돌려줘야 한다고 규정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곧 원수)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다면 그를 도와 나귀를 일으켜 세워주라는 거다. 나는 이 짧은 계명이 전제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윤리가 감탄스럽다. 누군가의 노동의 대가는 비록 원수의 것이라도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역사적 상황 때문에 미워하고 적대할 수 있지만 그게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 위에 설 수는 없다는 뜻이다.

 

 

 

도둑이 도둑 아닌 사회, 도둑 아닌 사람이 도둑 되는 사회

 

루터는 도둑질을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취하는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워 보이지만 ‘부당한 방법’이란 어떤 방법이고 ‘남의 것’의 범위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가 설명되지 않았다. 깔뱅은 도둑질이 무엇인지 직접 정의하지 않았다. 그게 뭔지 알려면 이웃에게 정당하게 행하는 게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공동선’(公同善)을 고려하지 않으면 도둑질이 뭔지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세상에 자기 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만 알고 자기 복지만 추구하는 사람은 눈에 띠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마이카가 아냐를 보이첵에게 데려갔을 때 보이첵은 “아이를 훔쳐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마이카는 “내가 내 걸 가져가는데 그게 왜 도둑질이냐?”고 대꾸한다. 영화는 이런 묘한 상황에 관객을 몰아놓고 묻는다. 마이카는 도둑질했나? 누가 도둑인가? 손녀를 딸로 입적해놓고 돌려주지 않은 에바가 도둑인가, 법적 엄마 몰래 아냐를 납치한 마이카가 도둑인가?

 

오늘날 세상에서는 누가 도둑인지 분명치 않다. 과거엔 명백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도둑이 도둑이 아니기도 하고 도둑 아닌 사람이 도둑이 되기도 한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합법화된 도둑의 체제’(a system of legalized theft)라고 부르는 ‘시장’(market)이 주요 원인이라고 말들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살고 있다. 시장경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물건을 시장에 내놓고 팔고 사는 체제로서 이걸 이끌어가는 힘은 ‘경쟁’이다. 경쟁력 있는 상품이 시장을 지배한다는 거다. 시장은 모두에게 공정하다고 말들 한다. 누구나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제 시장이 작동하는 모습은 그렇지 않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도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기왕 존재하는 법 안에서도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설상가상으로 힘 있는 자들이 법을 자기 입맛에 맞게 더 불공정하게 만들어놓았다. 법은 큰 범죄에는 눈감고 작은 범죄만 호되게 다스린다. 그래서 큰 도둑은 도둑이 아니게 된다. 시장경제체제는 큰 고기는 빠져나가고 작은 고기만 잡히는 기이한 그물이다.

 

에바와 마이카 두 사람은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 아냐가 자기에게 입적되었으니 자기 딸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합법적이기도 하다. 에바가 마이카를 구제해준 측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아냐를 자기 딸로 입적하겠다는 마이카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한을 품고 살았던 홍길동처럼 마이카는 딸을 동생이라고 부르며 살았으니 그 심정이 어땠겠나.

 

해피엔딩이려면 에바가 아냐를 마이카의 딸로 입적시키고 둘이 먼 곳으로 떠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를 언니로 불려왔던 마이카의 아픔을 에바가 헤아렸어야 한다는 거다. 마이카가 유괴라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그렇게 했으면 더 좋았겠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에바가 딸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진작 내렸어야 할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에 사태가 꼬였던 거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오늘날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꼬인 매듭을 푸는 방법도 비슷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갈등하는 양편 모두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경우 힘을 가진 편이 억지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해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잠복했다가 나중에 더 큰 힘으로 폭발할 수 있다. 힘과 결정권을 쥐고 있는 편이 적절한 선에서 양보하는 게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에바는 그렇게 결단하지 못해서 결국 딸을 떠나보내야 하지 않았나. 우리 사회에선 이런 식으로 결말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도둑질의 대상은 돈과 재물이 전부가 아니다. 남의 자유나 존엄성을 도둑질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사랑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가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다.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가볍게 버리는 사람도 있다. 사랑을 도둑맞고도 그런 줄 모르는 무감각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들과 자유, 존엄성, 사랑을 빼앗기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지키지 않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다르다.

 

우리 사회에는 도둑이 아닌데 도둑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했다가 범법자로 몰리는 사람도 많다. 안 그런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권리, 곧 천부인권(天賦人權)을 옹호하다가 법의 처벌을 받는 사람도 있다. 경제범죄를 수없이 저지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는 반면 수십 년 동안 인권운동에 헌신해서 여러 번 감옥살이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편이 진짜 도둑인지 잘 판단할 일이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부터 속이지 말아야

 

그리스도인을 죽은 후에 해부해보니 심장 옆에 돈지갑이 있더라는 말이 있다. 단순히 우스개로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12:33-34).

 

도둑질은 결국 ‘욕심’ 때문에 한다. 마음과 돈지갑이 같이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탐욕’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남의 것을 빼앗고 훔치게 만들기도 하고 공공재산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재산축적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재물의 노예들’ 때문에 재물이 없어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재물의 희생자들’이 생긴다. 재물의 노예가 없다면 재물의 희생자가 생길 까닭이 없다.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쓰는 것도 도적질이다. 아무리 자기 것이라고 해도 필요 이상으로 낭비하는 습관도 결국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재물에 대한 성서의 최종적인 교훈은 자신을 속이지 말하는 거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흔히 재물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이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을 자꾸 입에 올리는 속셈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재물은 선하게 쓰기보다는 악하게 쓰기가 더 쉽다. 재물을 선하게 쓰려면 땀을 흘려야 하지만 악하게 쓰는 것은 힘들지 않다. 예수님도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13)고 말씀했다. 재물은 중립이 아니다. 재물은 맘몬 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재물을 선하게 쓰려면 맘몬 신을 이겨야 한다.

 

재물과 관련된 거짓말은 이밖에도 많다. 나는 부자가 아니라는 거짓말, 노년을 준비하려고 그저 조금 모아놨다는 거짓말, 자식들을 위해서라는 거짓말,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도 재물을 쌓아놓을 수 있다는 거짓말 등이 그것이다. 이런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결단하지 않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도둑질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도둑질이 뭔지 알려면 먼저 이웃에게 정당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깔뱅의 말은 도둑질이라는 부정적인 행위는 이웃에게 정당하게 행하고 이웃을 정당하게 대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로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는 누가 도둑인지 가리기가 쉽지 않다. 에바와 마이카가 모두 도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사실은 어린 아냐가 두 사람의 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땐 어려서 모르겠지만 이 상처는 쉽게 치유될 상처가 아니다. 그녀 영혼 깊은 곳에 계속 남아 있을 거다. 이는 도둑질이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 파장은 훨씬 더 깊고 넓게 퍼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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