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곡致曲의 삶을 향하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43)

 

치곡致曲의 삶을 향하여

 

 

오늘 만나서 참 반가웠습니다.

 

홍안의 청년으로 만난 후 거의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군요. 세월의 빠름을 한탄해보아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동안 뭘 하고 살았나 돌아보니 회한이 밀려옵니다. 인생의 각 시간에 주어진 역할들을 감당하느라 나름대로 갖은 수고를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대개는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살았지만 시간을 타고 산 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 삶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등 떠밀리며 살던 시간, 어지러움이 아득하게 밀려올 때면 애써 잊고 살았던 허무함이 마치 안개처럼 나의 존재를 삼켜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허무함은 어둠의 중심으로 우리를 이끄는 냉소주의와는 달랐습니다. 지금 애집하고 있는 일들이 어쩌면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었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성공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을 저는 편안하게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보이는 뻔뻔스러울 정도의 욕망과 자아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아슬아슬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볕 좋은 오늘, 모처럼 우리가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신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려 보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습니다. 활발하게 움직이며 손님을 대하는 영천 시장 상인들, 골목길에 쪽파를 내놓고 퍼질러 앉아 다듬고 있는 식당 주인, 협소한 공간에 앉아 나른한 표정으로 바깥을 살피는 가게 주인들. 사람 사는 모습은 이렇게 평범하고 진부하지요. 하지만 그런 평범함과 진부함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들이 참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육교 옆에 있던 '00다방'이 지금도 그대로 있더군요. 하, 모두가 멋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있는데, 그 다방은 고집스레 옛 이름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늙수그레한 사내들과 히히덕 거리던 레지들도 이제는 60줄의 중늙은이가 되어 어딘가에서 살고 있겠지 생각하니 영문 모를 고적감이 밀려왔습니다. 지하 공간의 그 퀴퀴한 냄새가 기억 속에서 환기되기도 했습니다.

 

 

 

 

20대 초반 나는 그 다방에 틀어박혀 김수영의 시를 외우곤 했습니다. <거미>라는 시가 떠오르는군요.

 

내가 으스러질 정도로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까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이 시를 외우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설움에 감염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현종 선생의 번역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을 읽다가 김수영의 시와 느낌이 비슷한 시구를 발견하고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달이 사는 내 황폐한 침실 속에서,

내 식구인 거미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괴 속에서,

나는 내 잃어버린 자아를 사랑하고, 내 흠 있는 성격,

내 반짝거리는 충격 그리고 내 영원한 상실을 사랑한다.

-<소나타와 파괴들> 중에서

 

마침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주는 격이랄까요?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그래서 설움에 몸을 태우면서도, 여전히 자아를 온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이 시 속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았습니다. 이 시를 수첩에 적어놓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도 이런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면 나는 철들긴 그른 모양입니다.

 

그 가난했던 시절 허름했던 행자네서 점심을 라면으로 때우고 나면 어떤 친구들은 기도실에 올라가 엎드렸고, 나를 포함한 몇몇은 다방으로 몰려가 핏대를 올려가며 토론을 하곤 했지요. 신앙의 뿌리가 없었던 나는 진부한 신앙 논리 속에 머물며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이들의 허약한 논리를 깨뜨리기 위해 언어의 날을 세웠고, 나름 신실했던 이들은 염려스런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관습적인 언어와 전복적인 언어가 부딪치며 내는 굉음으로 아마 다방이 시끄러웠을 겁니다. 토론이 길어지고, 이야기가 순환논리에 빠지면 나는 인내심을 잃고 의도적으로 불온한 언어를 내뱉기도 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방식으로 믿지 않는다 하여 신이 내게 지옥행을 선고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들어가겠다.” 친구들은 뜨악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사실 그때 나를 사로잡고 있던 이는 알베르 까뮈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책을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을 보면 나의 내면에는 그 고독했던 사나이에 대한 이상한 그리움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는 교회가 한사코 지켜내려고 하는 그 진부한 예수보다는 까뮈가 더 매력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회의가 허용되지 않는 경직된 신앙의 언어보다는 터부를 깨뜨리는 불온한 말에 이끌렸던 시절이었습니다. 지옥 운운했던 것은 적어도 내가 믿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은 그렇게 편협하지 않다는 역설적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을 겁니다.

 

무신론적인 사상가 테리 이글턴은 “지옥은 순수한 소멸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지옥은 우리가 ‘들어가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빛이나 사랑이나 절망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없듯이 말이다. 전통 신학에 따르면 지옥에 있다는 말은 고의로 신의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신의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오는 상태다.”

 

그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볼까요?

 

“모든 생명력의 원천인 신을 떠나서는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궁극의 지옥은 불멸이 아니라 소멸이다”(테리 이글턴, 《악》, 오수원 옮김, 이매진 2015년 6월 25일, p.39).

 

지옥불의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통제하려는 이들의 저열한 욕망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모욕감을 느끼곤 합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슬람 신비주의 전통인 수피즘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유명한 여성 신비가인 라비아(Rabia)가 한 손엔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물통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비아는 “나는 지금 낙원에 불을 지르고, 지옥에 물을 끼얹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너울이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edited by James Fadiman & Robert Frager. <Essential Sufism>, Harper SanFrancisco, 1997, p.86). 라비아가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낙원/천국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믿고, 주어질 보상 때문에 믿는다면 그것은 순수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욥을 무너뜨리려고 애쓰던 사탄이 하나님께 했던 말을 기억하시지요?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기 1:9) 사탄의 질문은 매우 예리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허약함을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보상없는 믿음이 정말 가능할까요? 우리도 사람인지라 좋은 믿음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보상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을 넘어설 때 타락이 시작됩니다.

 

삶에 무슨 정답이 있겠고 신앙의 길이 어디 외길이겠습니까? 때로는 주어진 길을, 때로는 선택한 길을 시행착오를 거치며 가는 게 인생이겠지요. 걷고 또 걷는 동안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오련하게나마 떠오른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가 이십 대에 쓴 <가지 않은 길>을 기억하시지요? 노란 숲 속으로 두 갈래 길이 있었다지요? 시인은 두 길 모두 선택할 수 없어 섭섭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참 서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그 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길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두 길을 함께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가슴에는 회한이 쌓입니다. 어쩌면 가지 못한 그 길이 내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회한이나 비애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지금을 충실히 살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 23장에 ‘치곡致曲’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치’는 한발 한발 나아가 마침내 이르는 것이고, ‘곡’은 곡진하다는 뜻이니, ‘치곡’이란 마음과 뜻을 정성스럽게 한 채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정성스럽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거짓과 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익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온새미로 그분께 바칠 때 우리는 지금보다는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단풍이 들고 낙엽되어 떨어지는 일은 나무들의 겨울 준비라지요? 벗들의 머리에 내린 흰 이슬을 보며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어요. 이제는 진리의 빛으로 아름답게 물들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 흐뭇해지는 얼굴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주어진 삶의 자리가 어디든 성실하게 ‘그 길’을 걷는 벗들이 있다는 사실이 참 든든합니다. 이 좋은 가을날 부디 청안청락하시길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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