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길을 걷다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42)

 

가시밭길을 걷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사귀어 온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시어서 저도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성세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은 여전히 청년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청년 시절의 불온함도 열정도 치기도 제게서 이미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지레 마음이 늙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기도 합니다.

 

추석 연휴 기간 중에 제가 마음으로 좋아하는 목사님 한 분이 강원도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야영을 하면서 지내시는 이야기를 SNS를 통해 곁눈질하면서 그의 청년 정신을 부러워한 적도 있습니다. 홀로 그 깊은 계곡에 들어가 텐트를 치고, 밤의 추위와 싸우면서, 평소에 좋아하던 음악을 듣고 또 듣는 그 마음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전원 교향곡을 틀어놓고 마치 오케스트라가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지휘를 하는 모습을 보며 절로 찬탄이 흘러 나왔습니다. 시냇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의 가슴에 켜켜히 쌓였던 울울함도 씻겨내려 갔겠지요? 하얀 수염이 멋진 그 목사님의 모습 그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젊은이들이 불온해 보입니다. 버르장머리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철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른 위태로움을 느낍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멀미를 하는 젊은이들이 정말 많습니다. 선생님은 기성세대와 기존 권위에 대한 맹목적 부정과 적대감을 품고 있는 젊은이들의 세태를 우려하셨습니다. 대학사회에 몸담고 계시기에 그런 세태가 더욱 예민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어떤 분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정규직’이라고 대답한다면서 혀를 차시더군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게 적나라한 오늘의 현실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정부는 청년 가운데 직업을 갖지 못한 이들이 약 9%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대개 그런 공식적인 통계에 곱하기 3을 해야 한다지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청년실업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비정규직으로 일을 합니다. 그런 일자리조차 얻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면서 근근히 공부를 했고, 스펙을 쌓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하며 몇 년을 보냈지만 대학문을 나서는 순간 빚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어쩌면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보이는 분노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익명성 뒤에 숨어서 타자들에게 공격적인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보듬어 안으려 하기기보다는 거칠게 공격하거나 조롱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베’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베 현상은 종식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이는 공격성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많은 이들이 사회에 대한 자기들의 불만을 그런 방식으로 터뜨리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우려스럽습니다.

 

그들이 보이는 분노와 적대감은 타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자기 파괴적 열정이기에 더욱 심각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기득권자들은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사회적 분노가 높아갈 때 그 분노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곤 했습니다. 바로 '희생양 만들기' 문화가 그것이지요? 로마의 옛 시가가 화재로 인해 무너지면서 민중들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던 네로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네로는 민중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불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던 기독교인들이 그 심판을 앞당기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지요.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 말기에 사람들은 그 페스트의 책임이 마녀들과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녀 사냥이 벌어졌고,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이들은 대개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입니다. 아감벤의 말대로 그들은 ‘호모 사케르’가 되어 희생당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이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좌파들 때문이라고 선전합니다. 보수집단은 ‘잃어버린 십년’이라는 표현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세뇌했습니다. 그들은 참 손쉬운 해결책을 발견해낸 겁니다. ‘좌파’, ‘종북’,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이성적인 판단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이 자꾸 되뇌어지는 요즘입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시가 발표된 지 이제 거의 60년이 되어가는 데도 이 시는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게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그런 적대감을 만들고 그 적대감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나라야 어찌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신뢰의 토대인 언어를 타락시키고, 사람들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이들이 사탄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들에게 화풀이나 하면서 우리는 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인 강남순 박사는 분노를 배워야 한다면서 분노를 세 가지로 나눠 설명했습니다. 본능적 분노, 성찰적 분노, 파괴적 분노가 그것입니다. 본능적 분노는 내게 가해지는 침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일 겁니다. 성찰적 분노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정당한 분노입니다. 문제는 파괴적 분노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분노가 지나쳐 타자에 대한 증오, 원한, 복수심으로 전이된 분노입니다. 파괴적 분노는 행위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행위자를 향한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상대를 악마화하거나 파괴하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힐 때 생명은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강남순 박사는 불의에 대한 분노인 성찰적 분노를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책임적 관심’인 동시에 ‘변혁에의 열정’이라고 말합니다(2015년 10월 6일자 한국일보 컬럼을 자유롭게 요약). 옳습니다. 그런 분노가 없다면 세상은 악한 이들의 낙원이 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신학자인 알란 뵈삭(Allan Boesak)은 <Walking on Thorns>라는 책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심리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라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불의가 자행되고 거짓이 횡행하는 세상에 살면서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는 하나님도 세상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아파르트헤이트와 치열하게 맞서 싸운 사람이기에 그의 말은 강력한 울림이 있습니다. 그는 순교자 카즈 뭉크(Kaj Munk)의 말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오랫동안 교회의 상징은 사자, 양, 비둘기 그리고 물고기였다. 하지만 한 번도 카멜레온이었던 적은 없다.”

 

이 책을 읽은 것이 1990년이니까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저는 이 구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카즈 뭉크의 말은 자꾸만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오늘도 한 젊은이가 저를 찾아와서 자꾸만 현실과 타협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사뭇 진지한 그에게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적당히 적응하며 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삶은 엄중한 것이고 결국은 자기가 선택할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는 자기를 자꾸만 작게 만드는 세상에 분노하기보다는 자기 비하에 빠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악한 세상은 늘 그렇게 착한 사람들을 좌절시키곤 합니다. 강남순 박사가 말하듯 불의에 대해 분노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구조를 살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공부의 기회를 자꾸만 차단합니다. 세상 구조의 문제나 자기 실존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는 순간 루저가 될 것이라는 근거없는 두려움을 유포합니다.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은 한없이 취약해집니다. 유혹에 약해집니다. 사탄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자기 존엄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기만 하면 인생이 편해진다고 말합니다. 선생님은 마치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멍한 시선으로 창밖만 내다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자포자기적인 심정에 빠져 유혹 앞에 자기를 내던지며 사는 이들 때문에 마음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의 북소리에 발맞추지 않고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가리키는 이정표들이 많아져야 할 때입니다. 기성세대인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그것이 아닐까요? 이래라 저래라 누구를 가르칠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의 허망함을 저는 너무나 잘 압니다. 가르침은 가리킴이 되어야 합니다.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만 그마저 지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알란 뵈삭의 책 제목처럼 가시밭 길을 걷는 것 같을지라도 그 길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괜히 무거운 말씀을 올린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함께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마운 나날입니다. 깊어가는 가을날, 우리도 아름답게 무르익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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