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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성서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2)

by 한종호 2015. 9. 23.

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33)

 

성서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2)

- 정말 비정상적이고 부끄럽고 망측한가? -

로마서 1:18-28 고린도전서 6:9-10

 

뜻이 확실한 줄 알지만…

 

오늘은 신약성서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예수님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의 성적 지향에 대해 얘기하신 적 없습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도 전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인정하는 주장을 펼치는 데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침묵’으로부터 어떤 주장을 이끌어내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볼 구절은 고린도전서 6장 9절, 10절과 로마서 1장 26절, 27절, 두 군데입니다. 신약성서에는 동성애 관련 구절이 몇 군데 더 있지만 시간적인 제약도 있거니와 가장 중요한 구절이 그 두 군데이므로 그것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6장 9절, 10절을 보겠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불의한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간음하는 자들, 여성 노릇하는 자들, 동성애자들, 도둑질하는 자들, 탐욕 부리는 자들, 술 취하는 자들, 남을 중상하는 자들,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란 겁니다. 열한 부류의 사람을 열거하므로 상당히 길게 보이지만 세상에 불의한 자들이 이들뿐이겠습니까.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어디 이들뿐이겠냐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만 열거한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상황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들 중에 다른 사람들은 누굴 의미하는지 분명한데 ‘여성 노릇하는 자들’과 ‘동성애자들’이 누굴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여성 노릇하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말라코이’인데 이 말은 ‘부드러운 사람’이나 ‘여성스러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드물게는 ‘남창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나 ‘소아(小兒) 성애자들’(어린 아이와 성관계를 갖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답니다. 여기서는 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겁니다. 부드럽거나 여성스럽다고 해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라코이’는 ‘남창’이나 ‘소아 성애자를 가리킨다고 봐야 할 텐데 문제는 이 단어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그렇게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말 성서도 ‘탐색하는 자’ 또는 ‘여색을 탐하는 자’로 달리 번역했고 영어성서도 ‘adulterer’나 ‘male prostitute’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단어는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단어는 ‘동성애자’로 번역된 ‘아르세노코이타이’라는 말입니다. 학계에서는 이 단어가 ‘강제성이 있는 동성애자들’을 가리킨다고 학자들이 있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단어 역시 뜻이 분명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말 성서가 ‘동성애자’ 또는 ‘남색 하는 자’라고 번역했으므로 그 뜻이 분명한 걸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엔 하단에 각주를 달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뜻이 분명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모든 경우에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 만큼은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학자들 중에는 ‘말라코이’가 ‘성적으로 이용됐던 아이들’을, ‘아르세노코이타이’는 ‘말라코이를 성적으로 이용한 어른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문맥으로 보면 그럴 듯하지만 그렇게 볼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사실은,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는 겁니다.

 

            Lot leaving Sodom, Nuremberg Chronicle (1493)

 

그들만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다음은 로마서 1장 26, 27절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바울은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비난합니다. 여기서는 고린도전서에서처럼 ‘말라코이’나 ‘아르세노코이타이’ 같이 한 단어로 된 표현을 쓰지 않고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한 부끄러운 짓’(Men committed shameless acts with men)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하는 부끄러운 짓’이 뭘까요? 그것을 남성 간의 성행위라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더욱이 바로 앞에서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라고 말하므로 이 대목이 남성 간의 성행위를 가리키는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오해할 여지가 있는 번역부터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새번역성서>가 ‘바른 관계’와 ‘바르지 않은 관계’라고 번역한 말은 그리스어로 ‘자연스러운 관계’와 ‘자연스럽지 않은 관계’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개역성경>은 ‘순리대로’라고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바른 관계’와 ‘바르지 않은 관계’라고 표현하면 가치판단을 개입시키는 꼴이 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가 다른 의미이듯 ‘다르다’와 ‘자연스럽다’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에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럽다’거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반대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선 뭐가 옳고 뭐가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에 순응하는 것’과 그것을 ‘거스르는 것’을 가리킬 따름입니다.

 

그런데 ‘자연’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입장이 갈립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보느냐 아니면 시대의 풍조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피지코스’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보면 동성 간에 성관계 갖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역리’(逆理)라고 봐야 합니다. 반면, 그걸 시대정신이나 시대의 풍조라고 보면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걸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로 생각했지만 시대가 달라져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 차이는 해석에서 비롯된 차이입니다. 곧 해석자가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피지코스’를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해석하면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게 맞고 그것을 시대의 풍조로 해석하면 동성애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편이 옳다고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가능하므로 이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는 로마서 1장 전체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모든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보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곧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없더라도,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꿈이나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자연세계와 삼라만상만 봐도 하나님을 알고 느낄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시고 특별한 계시를 주셔도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우상이나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셨습니까? 사람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욕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욕되게 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간음하는 자들, 여성 노릇하는 자들, 동성애자들, 도둑질하는 자들, 탐욕 부리는 자들, 술 취하는 자들, 남을 중상하는 자들,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뜻이 분명하지 않은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는 이들 가운데 두 부류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구나 당신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생각이 허망해졌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들 중 두 경우인 겁니다. 그렇다면 의미가 분명한 다른 악행들, 곧 음행, 우상숭배, 간음, 도둑질, 탐욕, 술 취하는 것, 중상, 약탈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유독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만 떼어놓고 강조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결국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다

 

이상이 신약성서의 동성애에 대해 제가 하려는 얘기입니다. 그런 구절이 몇 군데 더 있지만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이제는 이 구절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과 인정하는 사람의 견해 차이는 결국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측과 인정하는 측 모두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동성애 반대 측은, 성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이므로 자기들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좌우간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반면 동성애를 인정하는 측은, 성서는 일차적으로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전해진 말씀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현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서를 이해하려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서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과 가치관, 과학지식 등은 현대인의 그것과 달라도 많이 다르기 때문에 현대인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금지계명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구약성서의 ‘모든’ 계명이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바다가제, 굴 등을 먹지 말라는 명령과 월경 중에 성행위하지 말라는 명령, 간음한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 등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동성애 금지명령은 이런 계명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성서의 모든 계명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 것 아닙니까? 반면 동성애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금지명령이 시간과 장소와 문화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성애자에 대한 의학적,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따져봅시다. 양쪽 입장을 들여다보면 양쪽 모두 성서를 선택적으로 읽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양쪽 모두 자기들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서를 선택적으로 읽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동성애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곧 더 중요한 말씀이 있고 덜 중요한 말씀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진리도 있다는 겁니다. 사실상 양편 모두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데 동성애를 반대하는 측은 그 사실을 부인하는 한편 인정하는 측은 인정합니다.

 

동성애 금지계명의 이유와 목적

 

동성애를 금하는 계명은 왜,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을까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보면 어느 편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만 말할 뿐, 금지계명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측 역시 답을 내놓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 반대는 인도주의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만 말할 뿐, 구약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금령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확고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계명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이유와 목적이 없이 주어진 계명은 없습니다. 아직 이유와 목적을 밝혀내지 못한 계명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그걸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구약에서 동성애 금지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동성 간의 성행위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에 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남자끼리의 성행위를 통해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구약성서시대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이 남자의 정액에 의해 전달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과학지식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정액을 의미 없이 낭비하는 일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야훼께서 보시기에 매우 악한 짓이었지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유다가 가나안 여인 수아를 아내로 받아들여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 중 큰아들 에르가 죽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라서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을 에르의 미망인 다말에게 들여보냈습니다. 다말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아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에게 아들을 낳아주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 재산의 일부가 그에게 가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난은 다말과 잠자리에 들었다가 정액을 바닥에 쏟아버리곤 했답니다. 이런 오난의 행위가 야훼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야훼가 그를 죽게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동성애 금지명령의 이유와 목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난의 행위는 남자끼리의 성행위와 똑같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기를 만들지 못하는 ‘무용한’ 성행위, 생명을 담고 있는 정액을 낭비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훼는 이런 행위를 악하게 보셨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서가 여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낭비하는 행위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제 오늘 설교가 거의 끝나갑니다. 성서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는지에 대해서 제가 하려는 얘기는 모두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까 하는 점입니다. 아직까지 해온 모든 얘기들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는 몸부림의 결과입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제대로 믿어보려고 노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실을 자주 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진실 말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뭘까요? 하나님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려고 애쓰고 알 수 있는 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텍스트’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아직까지 한 얘기가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구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해보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그 텍스트들을 어떻게 하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소원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성서도 읽고 학자들과 영성가들의 글도 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니까 매사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죄인이다, 죄인은 반드시 회개시켜야 한다, 회개하기 전까지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함부로 받아들이는 걸 걱정해서 받아들이지 말자는 편이 아니라 함부로 배제하는 걸 걱정해서 받아들이자는 편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는 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겁니까? 동성애에 대해서 성서가 명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면 동성 간에 성행위를 하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레위기 20장 13절은 동성 간에 성행위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하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하지만 동성애 반대자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투표에서 반대하고 거리시위를 하기도 하고 동성애자들을 말로 비난하기도 하며 가끔은 행동에 옮기기도 하지만 레위기가 명하는 대로 죽이지는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신들 주장대로 성서가 명해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면 성서의 명령 그대로 죽여야죠. 그게 아니면 성서의 명령대로 실천한다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 주장은 그들을 차별하자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들을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대우하지 말자는 겁니다. 반대로 동성애자를 인정하자는 사람들은 그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들을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대우하자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그들을 차별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차별하지 않는 게 옳습니까?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한 아이가 서 있고 그보다 더 어린 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습니다. 엄마 케이티 마이어의 아들 케이든은 7개월 때 척수근육위축 판정을 받았답니다. 아이의 근육은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겨우 한 살인 그는 휠체어에 탄 채로 아주 제한적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케이든이 엄마와 함께 과학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한 체험형 교육 장치를 작동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소년이 다가와서 케이든이 공 굴리는 기계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옆에 머물면서 함께 놀아줬답니다. 이를 보고 엄마가 소셜 미디어에 아래 글을 썼는데 그게 화제가 됐습니다.

 

 

과학박물관에 있던 작은 소년에게.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멋진 행동을 보여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과 함께 놀아줘서 고마워. 우리 아이가 바닥에서 공을 집지 못하는 걸 보고 네가 도와줬지. 왜 공을 집지 못하는지, 왜 못 걷게 된 건지도 묻지 않고 말이지. 케이든은 너와 아주 많이 닮았어. 호기심이 많고 아주 똑똑하지. 케이든은 물건

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 해. 케이든이 힘이 약한 걸 알아채고 같이 레버를 돌려줘서 고마워. 너는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수 없겠지만 너의 행동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단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케이든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은 꼭 왜 이렇게 된 건지 물어봐요. 그러면 나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져요. 그 소년이 내 아들을 보이는 상태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제게는 충격이었어요. 도와주면서도 정상인처럼 대했으니까요….”

 

동성애에 대해 찬성이니 반대니 하는 게 다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케이든에게 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바라봐주면 안 될까요? 그냥 있는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면 안 될까요? 저는 케이티가 한 말 중에 “그러면 나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요.”라고 말한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동성애가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논쟁하는 걸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동성애자들에게 미안해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태어나게 해서 그런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게 만들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미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향해서 미안해하시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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