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이 뭐예요?’

김기석의 톺아보기(16)

 

‘회심이 뭐예요?’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나서도 여전히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한 지인은 자기의 번민을 파스칼의 말을 빌어 표현했다. “저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의 눈빛은 먼 허공을 더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존의 심연을 응시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아득함 앞에 선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문득 필화사건으로 정보부에서 겪었던 시달림의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시인 박정만이 떠올랐다. 해 지는 쪽으로, 나마저 없는 저쪽 산마루로 가고 싶다고 말하던 시인은 <종시終詩>에서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속으로.”라고 노래한 후 우리 곁을 떠나갔다. 산다는 게 이렇게 힘겹고 눈물겹다. 무정한 세상에서 살다가 이름 없는 들꽃처럼 그저 스러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책에 서명을 부탁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많이 망설인다. 그저 이름만 적어주자니 성의 없어 보일 것 같고, 그렇다고 장문의 메시지를 쓸 수도 없는지라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요즘은 ‘참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 아무개’라고 쓸 때가 많다. 삶은 순례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동시에 그 길을 함께 걷자는 정중한 초대인 셈이다. 물론 순례의 귀착점인 ‘참’은 하나님이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자는 요구하지만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경구를 가슴에 새기고 살고 있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무겁고, 주위 사람들이 귀찮게 여겨질 때면 순례자로서의 본분을 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반성하곤 한다.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에 사로잡혀 있던 이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회심이 뭐예요?’ 질문이 단순할수록 대답도 간결해야 하는 법인데 대답이 쉽지 않았다. 겨우 어섯눈을 뜨고 삶을 가늠하는 이가 어찌 시원한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문득 ‘접속’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회심이란 자기 속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과의 접속, 하나님과의 접속, 이웃과의 접속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회심에 이르는 길은 우련하지만 손으로 발로 더듬으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다.

 

16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교부 도로테우스는 세계를 원이라고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중심은 하나님이고 그분의 광채는 인간들의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나님이 계신 원의 중심으로 다가간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 곧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되는 이 절묘한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다. 순례의 여정을 떠난 모든 이들이 마침내 하나의 중심 앞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란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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