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성서를 이렇게 읽어도 될까? 그럼, 되고말고! 그렇게 읽어야 해!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1)

   

정말 성서를 이렇게 읽어도 될까?

그럼, 되고말고! 그렇게 읽어야 해!

 

1.

구약성서를 읽을 때나 그것에 관한 글을 쓸 때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그것이 전하는 말씀이 정말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느님에 대해서한 말이나 쓴 서술도 그 성격을 진지하게 따져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차대한 문제는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곧 하느님이 나는 이러저러하다.”고 일인칭으로 말씀한 것, 그중에서도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들을 과연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직접적인 진술로 이해해야 하는가 말이다.

 

이 문제를 왜 구약학자들이 따져 묻지 않았겠는가. 그랬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역사적, 문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의 답을 얻으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왔다. 그럼 결론은? 서구세계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 다수의 학자들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직접 했다고 전해지는 말씀들도 그것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람의 손을 거쳤다고 이해한다.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의 말씀에도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서 구약성서의 하느님 말씀은 전적으로 사람의 말이라고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구약성서를 극단적으로 역사적인 문서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문서로 읽는다고 하면서 그 안에서 신적인 요소들을 모조리 이데올로기로 읽고서 지워버리는 학자들 말이다.

 

나는 이 문제가 입증의 문제라기보다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구약성서 자료만 갖고는 어떤 입장도 입증이나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내 입장을 설득할 수도 없다. 서로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물론 구약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이 공부하면서 입장을 바꿀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 깊이 공부해서 아는 사람은 기존의 입장을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글을 시작하는 마당에 내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이어지는 글들을 읽는데 도움이 되겠기 때문이다.

 

2.

구약성서의 모든 얘기들은 여러 단계에서 다양한 부류의 전달자들을 통해서 전해졌다. 이 점은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나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한 누군가가 있었듯이 아브라함이나 모세, 사무엘이나 다윗,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의 말도 그것들을 전달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 중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전달한 대표적인 전달자다. 유일한 예외가 십계명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야훼 하느님이 십계명을 직접백성들에게 선포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이 다른 계명들과 비교해서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십계명도 그것을 전해준 사람이 있었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우리에게까지 전달됐다는 점에서는 예외라 할 수 없겠다.

 

구약성서의 말과 사건들은 다양한 전달자들의 손을 거쳤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개 들어보면, 우선 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말과 사건들을 최초로 문자화한 사람, 저자’(autho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구전(口傳)된 것을 글로 적은 사람들이니 현대적 의미의 저자는 아니지만 학계에선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다. 이들이 전한 말과 사건들은 길이도 짧고 내용도 단편적이었다. 이런 단편적인 기록들을 모아 더 큰 단위의 얘기로 만든 사람을 수집자’(collector)라고 부른다. 예컨대 흩어져 있던 아브라함에 대한 단편적인 얘기들을 모아서 아브라함 전승을 형성한 사람들을 아브라함 전승의 수집자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렇게 수집된 전승들을 모으고 다른 전승들과 연결해서 더 큰 단위의 연속적인 얘기로 만든 사람을 편집자’(redactor)라고 부른다. 예컨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전승들을 편집해서 하나의 조상 전승군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편집자다.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서는 이렇듯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인 책이다.

 

마지막으로 설화자’(narrator)가 있다. 구약성서 모든 얘기들은 설화자에 의해 소개되어 있다. 예컨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1)라는 말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설화자가 한 말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얘기를 시작하는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창세기 22:1)라는 말 역시 설화자가 한 말이다. 이렇듯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든 말과 사건은 설화자가 소개하고 있는데 이 설화자도 일종의 전달자라고 볼 수 있겠다.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danielgallagher/2893958343)

 

우리는 이상의 전달자들, 곧 저자, 수집자, 편집자, 설화자의 이름이 뭔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오경은 모세가 썼고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가 썼으며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는 각각 이사야와 예레미야(그리고 바룩)가 썼다고 전해져왔지만 지금 학계에서 그렇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누가 됐든 하느님이 하늘에서 불러주신 얘기를 사람이 받아서 그대로 적었다고 믿는 학자 역시 거의 없다. 그대로 적지 않았으면 어떻다는 뜻일까? 그 말은 구약성서에 인간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 되겠다. 하느님이 직접 하셨다고 전해지는 말씀조차도 최소한 한두 단계의 전달자의 손을 거쳐서 전해졌다는 거다. 하느님이 백성들에게 직접 선포하셨다는 십계명조차도 그것을 전달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것들은 말해 뭐 하겠는가. 요컨대 구약성서의 모든 말과 사건은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됐다.

 

관건은 이렇게 전달자들을 거쳐서 전해진 하느님 말씀에 과연 그들의 입김이 어느 정도는 들어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전달자의 입김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고 보는 입장을 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머리도 가슴도 없는 누군가가, 아니면 머리와 가슴이 있지만 그걸 전혀 사용하지 않은 누군가가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받아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사람에게 전달하고 기록했다고 보는 입장 말이다. 나는 이 입장을 택하지 않는다. 나는 머리도 있고 가슴도 있는 누군가가 어떤 경로로든 자기에게 전해진 하느님 말씀을 받아서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공감한 다음에 그걸 사람들에게 전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이들에게 다양한 경로로 전해졌다. 사람 모양으로 나타난 하느님이나 천사가 전했을 수도 있고 꿈이나 환상을 통했을 수도 있다. 모세에게 그랬듯이 하늘에서 하느님 음성이 들려왔을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그 말씀의 전달자들이 머리도 가슴도 없는 인조인간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전달한 하느님 말씀에는 그들 자신의 머리와 가슴이 녹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구약성서의 하느님 말씀 중에 어느 정도가 하느님 말씀이고 어느 정도가 전달자의 말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두고 구약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둘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곧 전달자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전한 것에도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 있고 사람의 말에도 신적 요소가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야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말에 이어지는 얘기나 이상은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에 선행하는 얘기는 문법적으로는 하느님 말씀의 인용이지만 그조차도 전달자의 머리와 가슴을 거쳐서 전해졌으므로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3.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이다. 알 수 없으니 하느님이다. 사람이 알 수 있으면 그분이 어찌 하느님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다고 믿어왔다.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 자신이 알려주신 범위 안에서는 알 수 있다는 거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지만 자신을 알려주기 원하시는 분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이걸 계시라고 부른다. 하느님이 자신을 전에도 알려주셨고 지금도 알려주신다는 얘기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의도적으로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왜냐고? 아무리 좋은 하느님의 계시라고 해도 사람이 공감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이 반려동물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들과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곧 가슴으로 만나기 때문이란 말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것이 계시로 주어진다고 해도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의 이해수준을 넘어가는 계시는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유치원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쳐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과 같다. 나는 사람이 이해도 못하고 공감도 못하는 걸 하느님께서 계시해주신다고 믿지 않는다.

 

구약성서에 우리가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얘기가 많이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얘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성서가 전달되고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 안에서 당신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곧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자기들의 세계관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는 크게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이해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얘기들에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예컨대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상과제였다. 숫자가 많아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多産)은 최고의 명령이자 복이었다. 당시의 세계관이 그랬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인구가 75억이 넘는 오늘날 다산이 지상과제인가? 또한 지상과제로 여긴다고 해도 당장 그리스도인부터 그걸 실천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요즘 누가 과거처럼 주렁주렁 아이를 낳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구약성서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지상과제를 행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동성애 금지를 비롯해서 많은 계명들이 이 지상과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즘 교회에서 간음이나 동성애를 정죄하는 얘기는 많이 하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는 교회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안 그런가?

 

다시 말하는데 나는 구약성서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은 그것을 전한 전달자들이 이해한하느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하느님 말씀이되 전달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거쳐서 나온 하느님 말씀으로 읽는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그들의 세계관, 가치관, 신앙관,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와 해석의 폭이 넓어졌다. 하느님의 의지와 전달자의 신학을 구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앞에서 말했다. 전달자들이 자기들 세계관 안에서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봤고 어떻게 믿었는지를 먼저 이해하고 그 기반 위에서 우리 세계관 안에서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충분히 설명이 됐기를 바란다.

 

곽건용/나성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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