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34)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여름의 끝자락에 또 다시 큰 태풍이 다가오듯 마음이 심란합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벌어진 목함 지뢰 폭발로 촉발된 군사적 위기가 자못 심각합니다. 한미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이 시작되기 전 우리 군은 오랫동안 중단했던 대북 심리전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그리고 포격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22일까지 대북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전면전도 불사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고, 우리 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치킨 게임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늘 듣던 노래를 다시 듣는 것처럼 심드렁합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오래 살아온 탓인지 다소 불안하기는 하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고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의 마음은 바짝 타들어갑니다. 댁의 자제도 전역이 몇 달 남지 않았다고 하셨지요? 부대의 밴드를 통해 ‘조금 긴장되기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고 의젓하게 메시지를 전해왔더라며 웃으시는 모습이 오히려 서글퍼보였습니다. 히브리 시인의 탄식이 절로 떠오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시편 120:6-7).

 

끊임없이 평화를 교란시킴으로써 이익을 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공포심과 적대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 합니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어른들이 일쑤 ‘자꾸 울면 어비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적들의 존재를 상기시키곤 합니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산에서, 기도원에서, 교회에서 그들은 열정적으로 기도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자기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기도로만 그친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도란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의 거처를 떠나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새벽 박봉우의 시 <휴전선>(1956년)을 찾아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며칠 전 교회 사무실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는데 집사님 한 분이 교회 화단가에 서서 열심히 뭔가를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뭐 하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화단에 핀 백일홍을 보면서 그에 얽힌 이야기가 아슴푸레 떠올라 확인차 찾아보고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촌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을 위해 해마다 머리 셋 달린 이무기에게 아름다운 처녀를 제물로 바치곤 했습니다. 어느 해인가 한 처녀가 제물로 바쳐지게 되자 한 용사가 나서서 처녀로 분장하고 있다가 이무기의 목 두 개를 베었습니다. 처녀는 자기 목숨을 살려준 그 용사를 평생 섬기며 살겠다고 했지만, 그 용사는 이무기의 목을 마저 자르고 돌아온 후에 그리 하자며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무기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배에 흰 깃발을 달고 돌아올 것이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처녀는 백일기도를 올리며 용사의 무사 귀환을 빌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백일 째 되는 날 저 수평선 너머로부터 배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처녀는 목이 빠져라 그 배를 바라봅니다. 안타깝게도 그 배에는 붉은 색 깃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처녀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맙니다. 그러나 실은 이무기의 피가 흰 깃발에 묻어 붉게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붉은 색 꽃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백일기도를 드리던 처녀의 단심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 하여 '백일홍'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백일홍 이야기 속에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민중들이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처녀를 바치라 했던 이무기는 어쩌면 막강한 힘과 권력을 누리며 사람들을 억압하던 이들에 대한 민중적 표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설이나 민담에는 그러한 강고한 현실을 타파하는 영웅이 꼭 등장합니다. 백일홍 이야기에서는 이무기의 목을 자르는 영웅적인 인물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처녀는 죽고 영웅은 홀로 남습니다. 어쩌면 이게 진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무기는 또 다시 나타날 거고, 처녀와 영웅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또한 반복될 겁니다. 사람들은 여름이면 어김없이 우리 산하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백일홍을 보면서 불의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영웅의 도래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일홍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떠올린 것은 대만 출신의 신학자 C.S. 송(송천성)이 들려주는 《맹부인의 눈물》이라는 민담이었습니다. 민담은 진시황제의 통치하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진시황은 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변경 전체를 둘러싸는 성벽을 축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성벽은 쌓자마자 곧 무너져 버리곤 했기 때문에 공사가 전혀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현자가 나타나서 긴 성을 축조하려면 일 마일마다 한 명씩을 매장시켜야만 성벽이 완성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백성을 잡초쯤으로 생각하던 황제는 많은 이들을 생매장시키며 일을 진행해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유명한 학자가 황제에게 '만萬'이 10,000을 뜻하므로 만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마지막으로 성벽에 매장하면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고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막 결혼식을 올린 만씨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은 울부짖는 맹부인을 뒤로 한 채 군졸들에게 끌려갔습니다.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거대한 만리장성 앞에 당도한 맹부인은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라 땅바닥에 주질러 앉아 처절한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그 눈물은 거대한 성벽을 감동시켰고, 만리장성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닳아 부서진 남편의 유골이 그녀 앞에 흩어졌습니다(C.S. 송, 《맹부인의 눈물》, 도서출판 일과놀이, 1984년 7월 15일, p. 20-33 참조).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이 정도에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C.S. 송은 이 민담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정치 신학을 전개해 나갑니다. 국가안보를 빌미로 해서 민중들을 도구화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그는 모욕당하고 억압받으며 헐벗은 민중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치신학은 “민중의 눈물 즉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불행 때문에 흘리는 민중의 눈물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같은 책, p.89). 울 수 있는 민중, 가슴 아파 눈물 흘릴 수 있는 민중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첨병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가 떠오릅니다. 시의 화자인 ‘나’는 저녁거리가 없어 조나 감자를 꾸려 이웃 집에 갔다가 주인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합니다.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하고 노래합니다. 눈부신 전환입니다. 눈물이 렌즈가 되어 새로운 현실을 보게 하니 말입니다. 시의 화자인 ‘나’는 또한 민적民籍이 없다 하여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장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합니다. 하지만 시의 화자는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라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하고 노래합니다. 이 때의 슬픔은 애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근원적 슬픔입니다. 하늘은 그 슬픔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무기들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 위협하고, 집권자들이 국민들을 잡초처럼 여겨 함부로 희생시키고, 부자와 장군이 가련한 처지에 빠진 이들을 능욕하려 들고,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현실을 보면 암담합니다. 그래도 나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 ‘남에게 대한 격분’을 ‘스스로의 슬픔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령칙하게나마 그 세계의 깊이를 맛본 듯합니다. 슬픔은 그래서 희망입니다. 다시 한 번 백일홍에 눈길을 줍니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처녀는 죽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거듭거듭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맹부인의 눈물은 지금도 강고한 불의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새벽, 마음을 모아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를 올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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