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자람’은 신비로웠다

이종연의 '아기자기' 2015. 7. 18. 13:39

이종연의 아기자기(24)

 

‘생명의 자람’은 신비로웠다

- 일 년을 돌아보며 -

 

 

지난주에 이루는 (무려) 만 한 살이 되었다. 예정일보다 보름 일찍, 2.6킬로그램의 작디작은 몸을 입고 세상 나들이를 시작한 지 벌써 일 년이라니. 한 아이의 엄마로서, 지난 일 년을 돌아볼 때 (가장 상투적인 표현을 빌려 쓰는 수준을 혜량해 주시길) 감회가 남다르다. 표현은 상투적일지언정 정말이지 감회가 남다르다. 내가 엄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내가 일 년이나 아이에게 젖을 물릴 줄은 또 아무도 몰랐겠지.

 

어쩌면 엄마가 되고서도 (실제 이루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과 별개로) 여전히 ‘모성애’ 혹은 ‘헌신’이라는 단어보다는 ‘자기애’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도 꽤 있을 거다. 무엇보다 상상만으로도 버거웠던 ‘아기 엄마’로서 일 년이나 살게 될 줄 몰랐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이 사람아, 이 생애 끝 날까지 당신은 이루 엄마일세.)

 

 

 

 

아무튼 그렇게 이루의 일 년은 다가왔고, 매일 화상 전화를 하며 “이루야 보고 싶어”를 외시는 시부모님을 위해 지난주에는 시댁 식구들과 외식을 하는 것으로 돌잔치를 갈음했다. 한 해 동안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준 이루에게 고맙고, 또 이루가 이렇게 잘 자라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하니 두루두루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잔치를 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이런 부분에서는 공히 게을러서 가족끼리 식사만 하기로 했다. (이루 외가 식구들과는 다음 달에 만나기로 했다.) 그 대신 지금껏 이루를 위해 해 준 게 너무 없어서, 생일빔으로 옷 한 벌 사 주고(아직 외출복은 한 번도 사 주지 못했기에. 흑) 지금까지 찍어 온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고, 스튜디오 촬영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역시 게으름을 핑계로 생일 일주일이 지난 오늘까지 아무것도 못했다.)

 

돌아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육아를 위해 남편이 무려 회사를 그만두고 부부가 함께 육아를 했지만, 둘이 키운다고 남들이 아기에게 쏟는 에너지의 두 배를 쏟지는 못했다. 측정 기준이 불명확하기에 ‘사랑’이 부족했다고 할 순 없지만, 에너지는 짐짓 가늠이 되니 돌아보면 그런 듯하다.

 

우리는 (이루가 무척 사랑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육아가 버겁다’는 말을 자주 했다. 최근에는 이루의 떼가 늘기도 했고, 전에 썼듯 이사 후 이루의 수면 리듬이 깨진 탓에 우리 부부의 육아 에너지는 한참 달렸다. 거기에 더해 한없이 자상하던 남편이 에너지가 소진되어 내게 조금이라도 퉁명스럽게 대하면 나는 그게 참 서운했다. 그 동안 이유를 모르게 계속 되어 온 (그러나 견딜 만했던) 가슴 통증이 최근 심해진 것도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져 며칠 전 작정하고 병원에 갔더니 이스트 감염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온 뒤로 통증이 줄어서 좋은 게 9라면, 꽤 오랫동안 미련하게 참은 게 1쯤은 억울하다.)

 

 

 

 

이렇게 에너지는 부족한데 스트레스는 쉽게 받는 우리 부부가 모자란 부모 노릇을 일 년씩이나(?) 해 온 데 대해 주위에서 격려해 주셨을 때, 내 자식 내가 키우는 게 당연한 일임에도 괜히 좀 뿌듯했던 이유는 모든 게 ‘처음’이었던 지난 일 년을 지내 온 결과, 이루가 이토록 사랑스럽게 자라주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우리의 노력이 1이라면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가 9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생명의 자람’은 신비로웠다. (10이라고 하지 못하는 부족하고 귀여운 믿음을 주님이 어여삐 여겨 주시길.)

 

이번 주 들어 우리 부부의 스트레스 지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낀 남편이 ‘아기의 울음을 몹시 견디지 못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수면 교육에 나서 이루를 재우는 게 한결 쉬워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밤중수유를 끊은 것은 물론이고 이루 재우기에서도 해방되었다!) 게다가 요즘 이루의 애교는 날마다 정점을 찍고 있다. 어제는 못하던 ‘예~쁜 짓!’을 오늘은 하고, 뜬금없이 엄마를 쳐다보며 씩 웃지를 않나, 사부작사부작 아빠에게 기어가 배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고, 가르쳐준 적 없는데 ‘나 잡아 봐라~’ 하는 시늉을 하며 도망을 갈 때면 그 모습이 몹시 예뻐 눈물이 날 정도다.

 

이렇게 아이를 키우는 건가 싶다. 이렇게 나이를 먹는 건가 싶기도 하다. 힘든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의 한계와 모남에 부딪히는 어제를 살면, 오늘은 이루가 유난히 사랑스럽고, 그렇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렇게 지난 일 년을 지내왔나 보다.

 

이루야 고마워. 언제나 축복해. 날마다 사랑해.

 

남편 그간 애썼어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내일 이루 똥 기저귀는 내가 치울게요.

 

이종연/IVP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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