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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해킹, 도청하며 “벽에 소변 보는 자”

by 한종호 2015. 7. 16.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0)

 

해킹, 도청하며 “벽에 소변 보는 자”

 

 

좀 지저분한 말이 되어 주저스럽지만, 서서 오줌 누는 이들 때문에 벽들이 애꿎은 수난을 당한다. 벽에다 대고 함부로 소변을 보는 것은 남자하고 개뿐이다. 아직도 서울의 으슥한 골목길 벽은 남자들의 공중 화장실이 되기 십상이다.

 

소변금지를 알리는 구호도 갖가지다. 어떤 곳에는 가위를 그려놓고 위협을 주기도 하고, 어떤 곳에는 “개 이외는 여기에 소변을 보지 마시오”라고 써서 주정뱅이 오줌싸개들을 개로 깎아 내리기도 한다. 그래도 노상방뇨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또 이런 것은 동서와 고금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히브리어에서 사내를 경멸하여 일컬을 때 “벽에다 대고 오줌 누는 놈”이라고 한다. 즉 “서서 오줌 누는 놈”이란 말이다. ‘남자’나 ‘사내’라고 써도 될 곳에 이런 고약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런 경우는 대개 그 사내들을 저주하는 경우이다. 씨를 말려 버린다거나 멸족시켜 버릴 사내들을 경멸조로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쓰는데, 구약성서에 모두 여섯 번 나온다(삼상 25:22, 34; 왕상 14:10; 16:11; 21:21; 왕하 9:8),

 

“벽에다 오줌 누는 놈”이란 표현은 실제로 벽을 향해 소변을 보았거나 보고 있는 남자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오줌 누는 자” 곧 ‘남자’를 일컫는 것이다. 우리말 성서에 이 표현은 ‘남자’(개역, 개역개정), 혹은 ‘사내 녀석’(공동번역)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 의미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개역성경의 ‘남자’는 너무 완곡하여 경멸하려는 본래의 뜻을 못 살렸다. 공동번역의 ‘사내 녀석’은 그 뜻을 좀 살려 보려 했지만 히브리어 표현 뒤에 있는 해학적인 맛을 전달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렇다고 직역을 해 놓으면 이것이 정말로 벽에다 대고 소변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 버려 남자 일반을 일컫는 본래의 뜻을 전달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 할 바는 남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못한다는 반어법도 있다는 점이다. 벽에다 대고 소변도 못 보는 놈이 되면, 이건 노골적인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의 표현을 따지고 보면, 남자를 나타날 때 다른 성품이나 특징이 아니라 성기를 손으로 잡고 소변을 보는 자라는 점에 주목해서 그때나마 겨우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 뭐 이런 식의 경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리 치나 저리 메치나 이 표현은 상대에 대한 능멸이 담긴 것임은 틀림없다.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 좀체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자,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는 녀석, 손해 볼 줄 알면서 기어코 직언을 하는 자, 이런 식의 사내대장부는 아닌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성서에서 이 오줌 싸는 장면을 불알 두 쪽 운운하면 아마 난리가 나도 엄청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이렇게 불알 두 쪽밖에 사내임을 입증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졌는지. 명색이 사내라면, 남의 안방 문을 벌컥 하고 열고 들여다보는 법이 아니고, 이거 메르스 정보에요, 하면서 거기다가 이상한 장치 달아서 스마트폰을 몽땅 제 것으로 삼고 때로는 공격하지는 않는다. 도대체가 정정당당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들은 말로는 노상방뇨하면 안 되, 잡아간다, 하면서도 남들이 안 보면 저들이 먼저 벽에다가 갈긴다. 누가 센지 어디 보자, 하면서 경쟁하듯이 말이다. 뭔 이야기인지 독자들은 척 하면 척하고 알 것이다. 국정원이라는 데에서 어마어마한 해킹장비를 들여다 놓고, 쥐새끼마냥 밤 말을 듣겠다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두 쪽밖에 없는 사내놈들이 하는 짓이렸다.

 

그리고 이들 상전은 음~. 벽에다 대고 소변도 못 보는 상전이라면 무지막지한 욕이 될까? 이때까지 내가 쓴 글 가운데 아마 이게 제일 성서적인 것은 아닐까? 그것도 구약성서에 여섯 번이나 나온 표현을 들고 세상에 나왔으니 말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벽에다 대고 그럴게 할 힘을 자랑할 기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내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래서 남의 스마트폰에다 제 귀를 달아 엿들을 정도는 아니로다.

 

다음에는 국정원 직원 뽑을 때, 두 쪽 말고 다른 것도 있는지 조사해 볼 일이 아닐까? 세상이 험하다보니 성서학자가 별 생각과 궁리를 다 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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