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가 설마를 이긴 날

이종연의 '아기자기' 2015. 1. 11. 15:20

이종연의 아기자기(1)

 

혹시가 설마를 이긴 날

 

 

이루를 재워 놓고 거실로 막 나왔다. 그때 들려온 띵동하는 메신저 소리, 아 반갑다. 집에서 애 키우는 엄마에게 연락 올 일, 잘 없다. 그러니 바깥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저 기계음이 참말 반가울 수밖에.

 

하늘을 만 가지로 채우시는 하느님, 아기의 만 가지 몸짓이 제게는 당신의 뜻입니다(여성의 기도 - 임신 40주간 기도서).

 

회사 사장님이 읽다 좋아 생각나서보내셨다는 메시지다. 휴직 중인 직원까지 챙겨 주시는 사장님이 계시는 회사, 참 좋은 회사 아닌가. 하지만저 글귀도 정말 좋으냐고 묻는다면201311그날이 며칠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날, 바로 그날, 나와 남편은 지금 저 방에서 자고 있는 아기의 존재를 확인했던 거다. ‘설마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혹시하는 불안이 더 컸기에 밤잠도 못 이뤘다. 그리고 새벽 6시에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결국 그날 아침에 우리는 임신 테스트기에 그어진 두 줄을 보고 말았다.

 

혹시(임신일까?)가 설마(임신은 아니겠지)를 이긴 그 날, 위 기도문이 언젠가 내 마음에 들어올 거라는 생각 따위는 할 수조차 없었다. 왜냐면, 나는 단 한 번도 아기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풍진 세상, 지옥보다 무섭다는 이 세상에서 아기를 낳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마저 하며 살아온 나다. 아니, 나는 애초에 누군가를 돌볼 마음의 여력을 품고 사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십대 때부터 해 온 생각이니 꽤 진정성 있는 생각 아닌가. 내 한 몸 간수하며 사는 것도 버거운데 누굴 키운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지금도 시댁에는 비밀이다. 아시면, 4년 가까이 주님이 (아기를) 주시지 않는다고 뻥을 친 며느리를 생각하며 그분들은 밤잠을 설치시고 새벽기도에 늦으실지도 모른다.)

 

다만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래도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결혼이다. 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둘이서 지내는 시간이 진정 행복했고 평생 둘이서만 살고 싶었다. 마침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직장에서도 즐겁게 일하고 있었단 말이다.

 

 

때때로 주위에서 2세 계획을 물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입장을 최대한 담담 또 당당하게 전했고, 그런 날이면 침대에 누워 결혼 전부터 퍽이나 자주 했던 그 얘기를 남편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남편은 나와 꼭 생각이 같지는 않았지만 아기를 갖고 싶은 생각이 크지 않았기에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런데, 덜컥 생명이 찾아온 거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피임 실패였다. 나중에 내 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게 임신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고,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큰 비탄에 빠지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내가 한 행동을 지금도 나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일은 일인지라 침울한 마음을 숨기고 제주로 출장을 가야 했다. 김포공항 보안 검색대를 지날 때였다. 나는 무려 임산부 전용 통로로 가서 저 임산부예요라고 말했다. 으레 그래왔을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고 나는 태연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이륙하는 순간부터 숨죽여 (아무도 듣지 못하게 꺼이꺼이) 울었다. ‘저 임산부예요, 저 임산부예요, 저 임산부예요!!’라니! 그렇게 나는 나의 임신 소식을 세상에 알렸다.

 

 

이종연/IVP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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