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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돈의 전능성을 해체하라

by 한종호 2023. 6. 19.

 

돈의 전능성을 해체하라

 

 

독서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까?” 답답해서 던진 질문이겠지만 그 질문 속에 담긴 쓸쓸한 비애를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돈에 포획된 교회의 현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교회를 사고파는 사람들, 목사 선정 과정에서 후임자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지요? ‘저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겠지’ 하는 생각에 쉽게 정죄하지 않으려고 애써 보지만 결국 도리질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익의 원리가 의의 원리 혹은 신앙의 원리를 대체할 때 거룩함은 가뭇없이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부끄러움조차 없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종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부끄러움은 자기 평가적 감정입니다. 어느 분이 부끄러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자괴성 부끄러움’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가 자기 내면에 설정해 놓은 가치 기준과 위배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둘째는 ‘창피성 부끄러움’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공동체가 설정해 놓은 가치 기준과 위배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부끄러움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합니다. 윤동주는 온 국민의 애송시라고 할 수 있는 <序詩>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구는 정말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자기의 잘못을 호도하기 위해 인용할 때가 많습니다. 바야흐로 부끄러움이 무너진 세상입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가에 꽂힌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빼들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58살 되던 1958년에 쓴 글입니다. 6.25 전란을 겪고도 아무런 교훈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질타하는 예언자의 소리가 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 깨달음으로 되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법이다.”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불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올가미를 벗겨내는 것처럼. 글을 읽어 가다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언어에 그만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모든 일은 뜻이다. 뜻에 나타난 것이 일이요 물건이다. 사람의 삶은 일을 치름[經驗]이다. 치르고 나면 뜻을 안다. 뜻이 된다. 뜻에 참여한다. 뜻 있으면 있다[存在]. 뜻 없으면 없다[無]. 뜻이 있음이요, 있음은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 저작집5, 한길사, p.102)

 

뜻, 뜻이 문제입니다. 뜻을 품기 위해서는 깊은 사상이 있어야 하고, 깊은 사상은 깊은 종교, 위대한 종교로부터 옵니다. 함석헌 선생은 “종교란 다른 것 아니요 뜻을 찾음이다. 현상의 세계를 뚫음이다. 절대에 대듦이다. 하나님과 맞섬이다. 하나님이 되잠이다. 하나를 함”(같은 책, p.109)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치열함이 없다면 종교는 현상질서(status quo)를 추인하는 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상 너머의 세상을 뚫기 위해 고투하고, 또 대들고 맞서면서 깊은 좌절을 경험하지 않고 깊은 세계에 당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함 선생님은 전쟁 이후의 개신교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전쟁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종교단체들이었다. 피난을 가면 제 교도만 가려하고 구호물자 나오면 서로 싸우고 썩 잘 쓴다는 것이 그것을 미끼로 교세 늘리려고나 하고, 그러고는 정부·군대가 하는 일,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고 날씨라도 맑아 인민군 폭격이라도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대적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 정치하는 자의 잘못을 책망하는 정말 의(義)의 빛을 보여주고, 그 때문에 핍박을 당한 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간난 중에서도 교회당은 굉장하게 짓고 예배 장소는 꽃처럼 단장한 사람으로 차지, 어디 베옷 입고 재에 앉았다는 교회를 보지 못했다.”(같은 책, p.113-114)

 

57년 전에 쓴 글이지만 어쩌면 이리도 생생합니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종교가 특히 우리 개신교회가 깊어지지 못한 때문입니다. 온 몸으로 죽음의 세력과 맞서는 십자가의 정신은 저만치 내팽개치고, 들큼한 위안과 복을 선포하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많지만 그 핵심과 만나 자아가 무너지고 새로 난 이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에 미혹되어 사탄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권세라는 것이 본래 헛것임을 알아차릴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초월의 빛 가운데로 세상을 견인해야 할 교회가 세상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구매력이 곧 권력입니다.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큰 돈을 가진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전능자’로 인식합니다. 그들의 주변에는 늘 그들을 유사-신(pseudo-god)으로 떠받들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땅콩 회항 사건은 바로 이런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는 비행기를 멈춰 세웠습니다. 자기 힘에 도취되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산그룹의 명예회장인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학교의 구조 조정안을 반대하는 비대위 교수들을 조두(새대가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보직 교수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자기 속에 있는 악감정을 절제 없이 노출했습니다. “인사권을 가진 내가 법인을 시켜 모든 걸 처리한다. 그들이 제 목을 쳐 달라고 목을 길게 뺏는데 안 쳐주면 예의가 아니다.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쳐 줄 것이다.” 이 말 어디에서도 인간의 품격이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돈의 전능함을 과신하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자본의 시선은 메두사의 시선과 같아서 바라보는 모든 것을 물화시키고 맙니다. 함석헌 선생은 지금은 참회해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국민 전체가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에서 울음으로 하는 회개 말고(그것은 연극이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여야 할 것이다.”(같은 책, p.115)

 

세상이 온통 부정한 돈 냄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치권에 유입되는 부정한 자금은 가진 자들만의 리그를 조성하는 데 활용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돈은 문화계, 경제계, 언론계, 종교계 할 것 없이 모두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지금처럼 처절하게 실감하는 때가 또 있을까요? 나는 늘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서로 함께’의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선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우정의 동심원이 점점 커진다면 돈의 전능성은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너무 낭만적인 생각인가요? 사실 이것이 “돈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아주 없는 거냐?” 하신 그 질문에 대한 잠정적 대답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삶의 주체로 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문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삶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문법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늘 마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수용소는 사람들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수감자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했습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p.58)

 

사람을 비인간으로 몰아가는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저항의 시작입니다. 가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명증처럼 들려오는 한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7천 명을 남겨두셨다는 말씀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세상 어딘가에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선 자리에서 천 년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산다면 이 어둠의 땅에도 결국 새벽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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