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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안식일의 혁명성

by 한종호 2015. 4. 19.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6)

 

안식일의 혁명성

- <기독교도의 이상> 1938년 9월 -

 

 

우리가 사는 후기근대 사회의 구조적 속성이 그런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쉴 수 없는 구조 말이다. 고용마저 ‘유연’하게 대체되는 마당인데, 내가 여전히 쓸모 있다고, 더 잘 기능할 수 있고, 더 싸게 기능할 수 있으며, 더 순종적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매일 입증하며 살려하니, 쉴 틈이 어디 있겠나! 생계를 위한 일상의 수고가 ‘젊어서 사서 하는’ 한시적 고생이 아니라는 것쯤은, 대한민국 서민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쉼이 있다면 그것은 고용상태를 벗어났을 때에나 가능하겠지만, 그 상태는 대부분의 서민에게 ‘조만간 아사’를 의미한다. 사회학을 배운바 없어도 가장 일선에서 매일 이 구조를 몸으로 살아내는 서민들은 이미 사회학자이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과로사냐 아사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노동인력이 되자하니 곧 과로사할 지경이고, 숨을 쉬면서 제대로 살자하니 직장을 잃고 곧 아사할 상황이라는 탄식이다.

 

그런데 이 구조적 피로감에 더하여 우리는 최근 세월호 1주기를 지내면서 정서적 피로감으로 고통 받고 있는 중이다. 바야흐로 중간고사 기간인데, 학생들도 선생도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저마다의 숙제들을 앞으로 당기고 뒤로 미루며 광화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월 16일, 현장에 못 가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어깨는 ‘죄책감’의 무게로 땅에 닿을 만큼 내려 앉아 있었다. “괜찮아, 열심히 공부하렴! 다만 꼭 기억해라. 긴 싸움이다. 너희들의 힘을 발휘할 기회가 왔을 때 너희가 쌓은 실력과 전문성으로 꼭 ‘살리는’ 선택을 하렴. 그걸 위해 지금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책임 있는 행동인 거야. 그러니 개인의 학점만을 위해 공부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구나.”

 

끄덕이는 고개와 울먹이는 눈동자를 뒤로하고 광화문으로 향했지만, 나 역시 ‘죽을 맛’이었다. 이 하루를 빼내기 위해 내가 앞으로 뒤로 당기고 미룬 일들을 떠올리니 육체적 피로감이 더했다. 오후 무렵 마치 아이들의 눈물처럼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하염없이 걸어 도착한 광화문. 16일에서 17일로 넘어가는 밤은 그야말로 이미 오랜 피로로 몸이 지친 시민들끼리 서로 나누는 ‘미안함’의 퍼레이드였다. 물론 애통과 분노의 연대가 뜨거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오래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발걸음과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저녁 늦게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하는 사정으로 서너 시간 일찍 광화문에 가 있었던 나는, 한창 문화제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할 무렵에 빠져나와야했는데, 마음 한가득 마치 ‘배신자’라도 된 심정이었다. 대학부 단체 카톡방에서 서로 ‘어디냐’고 찾고 있는 메시지들을 보니 아이들을 두고 가는 것에 더욱 미안함이 컸다. 아마 10시에 나온 사람은 11시까지 그곳에 있었던 시민들에게, 11시에 떠나온 사람은 자정 무렵까지 유가족 곁을 지킨 사람들에게, 그리고 새벽녘에 일터로 돌아온 사람들은 차가운 4월의 밤을 광화문 한복판에서 지새운 사람들을 향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의 카톡 내용도, 페이스북 지인들의 상태메지지도 모두 더 있지 못해 남은 자들에게 미안해하는 마음들로 가득했다.

 

이것 참! 문득 세월호 참사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적이 없는 보통의 시민들을 일상의 육체적 피로감에 더해 죄책감이라는 ‘정서적 피로감’을 가지고 살도록 내몰고 있는 이 현실이 어이없었다. 도대체 우리 사회는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언제야 진정한 영·육의 안식을 누리게 할는지. 도대체 안식을 하여야 비로소 나의 전인격적 존재 안에 우주적 생명이신 하나님을 ‘들이마시고’(들숨) 다시 살아낼 힘을 가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순식간에 당한 생명의 상실도 버거운데 쉼 없이 거리에서 ‘진상규명’을 외치는 유가족들을 비롯하여 그들과 함께 애통하고 분노하는 우리는 도대체 언제야 쉼다운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실로 이 ‘안식’은 유대-기독교적 신앙고백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인데 말이다. 인간은 안식을 누려야 다시 살고 제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데 말이다. 김교신도 이를 제대로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놀라운 사실인 것은 기독교의 이상은 활동과 사업에 있지 않고 안식에 있다는 일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우주 만물을 6일간에 창조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 하였고, 고래의 많은 성도들이 이 생을 마치는 날 저 생의 안식을 약속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정으로써 등정(登程)한 것도 이 예수쟁이의 이상이 그 안식에 있는 까닭이다. 실로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 중에 가장 큰 교훈이 이 안식의 희망이요,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이 안식의 약속이었다. …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 만반사에-가축 노비와 전토의 경작에까지도 안식을 주었고 … 일렀으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고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고.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고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는 성서의 말씀은 결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숨 막히게 돌아가는 인간사로는 구원의 살림살이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요, 그러하니 인간적 도모를 하는 중간 중간에(적어도 7일에 하루는) 모든 인간 시도를 멈추고 오로지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 원리에 집중하라는 신적 명령이다. 쉼 없이 달리는 인간의 도모가 어떤 살림살이를 만들지, 하나님은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런 계명을 주셨을 거다.

 

그런데 보라, 근래의 세태는 어떠한가. 스피드 스피드 하여 육해공의 교통기관은 극도로 발달하였고 집무와 사교의 기구는 일찍이 상상도 못했던 만큼 완비되었건마는 현대 사람처럼 분망한 인간들이 일찍 있었던가. 안식을 무시한 인간들은 무엇이나 강조할수록 부동(浮動)이요 스피드가 가해질수록 망쇄(忙殺)이다. 생산할수록 물자 결핍고는 날로 더해지며 활동할수록 공허의 감은 날로 절실하지 않은가. 대체로 깊은 안식을 모르는 인간이 강조한대야 그는 참 강력(强力)을 발하지 못하며 영원한 대안식의 소망을 못 가진 자가 활동한대야 그는 실된 결과를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세상과 같이 동(動)하는 자는 세파에 부서질 것이며 스피드를 따르는 사람은 스피드에 침몰되리라.

 

‘침몰’이라는 단어는 이제 맨 정신으로는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김교신이 말미에 적은 ‘침몰’의 예언은 적중했다. 김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영험하여서가 아니라 안식하지 않는 인간성이 만들어낼 악을 성서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생명이 풍성하게 살고, 시들어가는 생명은 다시 살려내라는 지상명령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내 안에 온전히 받기 위하여, 인간은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온전히 쉬어야한다. 이 온전한 쉼이 없다면, 인간은 제 속도에 취하여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탐욕적 질주를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임이 일상인 제도를 만들어 놓고도 잘못인줄 모르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발 쉬라’는 안식일은 혁명적 명령이다.

 

 

 

 

이 흐름에 동조하여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간의 훈장처럼 지니는 ‘피곤함’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케 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봐라! 갈대아 우르가 그랬기에 아브람에게 ‘떠나라’ 명령하시지 않았던가, 이집트가 그랬기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와라’ 명령하시지 않았던가! 떠남과 나옴을 반드시 공간적 이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김교신의 글에서도 명시되어 있듯이 지금 이 시간과 이 공간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동안도, 온전한 하루를 ‘안식’함으로 우리는 지금 인간이 만들어낸 이 반(反)생명적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고 걸림돌이 되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생명의 나라를 하루씩 앞당기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모름지기 부동하는 위대한 안식에 이상을 두고 안식을 맛보는 생활자가 되어서 완완하게 한걸음 한걸음을 진보하는 자라야만 이 부동 망쇄의 세상에서 구원함을 받을진저. 안식을 이상으로 품는 기독교에 참 구원이 있는 까닭을 알진저.

 

이 길이 길고 멀고 험하다. 그러니 여섯 날 동안 치열하게 살아내고 우리 하루는 쉬자. 궁극적으로 이 땅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기쁨을 누리는 살림살이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하루는 떳떳하게 죄책감 없이 쉬자. 그래야 오래, 지치지 않고, 타협함도 없이, 하나님의 살림의 질서를 이 땅에 도래케 하는 싸움을 지속할 수 있을 터이니….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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