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말, 고운 말 그리고 홀로서기

이종연의 '아기자기' 2015. 4. 12. 14:41

이종연의 아기자기(13)

 

예쁜 말, 고운 말 그리고 홀로서기

 

 

“어머나!” 놀란 입을 한참 다물지 못했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연거푸 헛구역질을 해대던 이루가 10원짜리 크기의 배달 음식점 쿠폰을 입에서 뱉어냈다. “이걸 언제 삼킨 거야!?” 남편도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이유식을 먹이던 중이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걸 먹다니!

 

이루 월령대(9-10개월) 아기들에게 주방은 가장 즐거운 놀이터 같다. 하루 세 끼 밥을 하고, 밥을 먹고, 먹은 자리를 치우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간다고 느낄 만큼 많은 시간을 엄마, 아빠가 주방에서 보내니 이루도 거실에서 놀다가 곧잘 주방으로 기어와 나나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서서 배시시 웃을 때가 많다. 늘 식탁 밑에 들어가 노는 걸 보면 그만큼 재미난 곳도 없는가 싶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먹을거리는 또 얼마나 풍성한지!

 

아무튼, 어제도 이루가 주방에서 놀다가 보조 조리대에 붙은 문제의 쿠폰을 떼려고 안간힘을 쓰기에 “이건 안 돼!” 하고선 이루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붙여 두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보조 조리대 바로 옆에 이루의 식탁 의자가 있고, 식탁 의자에 앉아 팔만 조금 뻗으면 스티커를 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어 다니기 시작한 한 달 전부터 이루의 활동 반경은 매우! 넓어졌다. 일단 손에 잡히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입으로 가져간다. 게다가 뭐든 붙잡고 일어서는 걸 좋아해 치워야 할 물건은 더 많아졌다. 이것저것 치우다가도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만지고 맛보고 흔드는 이루를 보면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 예쁘다.

 

 

 

그런 이루에게 자주 하게 된 말 중 하나가 “안 돼!”다. 위험하다 싶은 건 눈에 띄는 대로 치우지만, 내 눈에 띄기 전에 이루 눈에 먼저 띄는 게 어찌나 많은지 모르겠다. 뒤늦게 “안 돼!”하고 빼앗으면(내 딴에는 조심스레, 이루의 시선을 돌리고 치우려 하지만 사실은 뺏는 게 맞다) 이미 축축해져 있는 물건들은 동전, 종이, 핸드폰 충전기, 지갑, 신고 아무데나 던져 둔 양말 등이다. 좀 찝찝해도 웬만해선 가지고 놀게 하는데 앞에 나열한 것들은 아무래도 위험하고 더럽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안 된다’는 말보다 예쁜 말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게 영 미안하다.

 

하루가 다르게 큰다는 게 실감이 날 정도로 이루는 요즘 전에 하지 않던 행동들을 하곤 한다. 표정도 표현도 다채롭다. 이런 변화가 신기하기도 하고 어디서 배웠을까 궁금하기도 한데,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혹시 모방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면 그건 100퍼센트 나나 남편이 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니 예쁜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먼저 배우게 될까 봐, ‘안 된다’고 말할 때 배어 나올 위압감, 놀라거나 구겨지는 얼굴도 그대로 노출될까 봐 짐짓 염려스럽다. 내가 좀 더 세심하게 치우면 덜해도 될 말인데, 하고 나면 미안해지는 말인데.

 

아마 어느 때가 되면, 부모가 세심하게 살피는 것과는 무관하게 아이가 고집을 부려서 ‘안 된다’는 말을 꼭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훈육’이라는 것을 해야 할 때가 올 텐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허락할 수 없는 것들을 어느 수준에서 제지할지 또 어떻게 타일러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 후에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줘야 할 때도 올 텐데 그것도 잘 모르겠다.

 

처음 하는 부모 역할이니 서툰 게 당연하고, 너무 앞선 고민을 사서 할 필요는 없으니 천천히 배워 가며 키우자 싶다. 다만, 처음이라는 핑계를 대며 시행착오를 하는 것에 너무 관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각본 없는 생방송과 같은 게 인생이라 편집을 할 수도, 다시 찍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다른 얘기지만, 요즘 남편은 부쩍 ‘꿈’(잠잘 때 꾸는 꿈과 미래에 실현하고 싶은 희망 모두를 뜻한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루를 돌보는 것 외에는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된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찾기 위해 ‘무의식’이 꿈을 통해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꿈’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꿈’은 이렇게 무의식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와 대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인데, 나 또한 최근에 꿈과 관련한 책을 읽었으면서도 ‘꿈’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평소 유쾌하지 않은 꿈을 잘 꾸는 까닭도 있고, 어제처럼 잠자리에서 공포 영화나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 악몽을 꾸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남편은 전문가라도 되는 듯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네 무의식이 너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생각해 봐”라고 했다.

 

문득 내가 별것 아닌 일에도 잘 놀라고 겁이 많으며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면 남편을 꼭 끌어안고 꿈에 나올 것 같다며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린 시절 나는 아빠로부터 극진한 사랑이나 보호를 받은 기억이 없다. 아빠에게 칭찬받기 위해 혹은 야단맞지 않기 위해 모범생이 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다정다감한 현대 식(?) 아빠를 기대한 것은 무리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오히려 20대가 된 후에는 아빠랑 오붓하게 잘 지내기도 했는데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에 그런 기억이 내게 상처로 남았나 보다.) 그래서 그때 부리지 못한 응석과 보호받고 싶은 본능이 다 자라서야 발현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루에게 “안 된다”고 했던 한마디에서 시작된 생각이 심하게 점프를 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 안 하고도 신경 써서 예쁜 말 고운 말 얼마든지 해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점프하길 잘 했다. 글을 쓰면서 내가 ‘꿈’을 무서워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나도 이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루야, 고맙다.

 

이종연/IVP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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