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

하얀 감기약

by 한종호 2022. 4. 5.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아이들의 감기약은 

가장 쓴
인생의 쓴맛이었다

봄날에도
기침이 잦았던 나는

약을 먹지 않으려고
목련 꽃봉우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달아나지도 못하고
나뭇가지 끝에 앉은 듯

아빠 다리를 하고서
요지부동 앉아 있으면

아빠는 밥숟가락에 
하얀 가루약과 물을 타서

큼지막한 새끼손가락으로 푹
무슨 약속이라도 하시려는 듯 휘휘

가루약이랑 물이 풀풀 날리니까
나중엔 젖가락 끝으로 휘휘

살살 약을 개어서
먼저 맛을 보셨다

아빠는 그 쓴 약을 
설탕처럼 쪽쪽 드시며

쩝쩝 소리까지 내시면서 
"아, 맛있다! 감탄사까지 타신다

세상이 다 아는 
하얀 거짓말까지 하시는데

아빠 얼굴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구름 한 점 없이 
웃기만 하신다

나는 속으로 
걱정이 되어서

감기도 안 걸린 아빠가 
내 감기약을 드셔도 되는지 

사실은 
미안한 마음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아" 했다

하얀 목련꽃 같이
하얀 기침처럼

내 입이 달아나느라 남긴
약숟가락을 사방 돌려가며

아빠는 입으로 말끔히 닦아드신다
발우공양 하듯이

약숟가락 아니 밥숟가락이 반짝
아빠 앞머리처럼 빛난다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촛불 잔치  (0) 2022.04.09
💺'여사'의 새로운 뜻  (0) 2022.04.08
봄(32)  (0) 2022.03.19
이 봄을 몸이 안다  (0) 2022.03.14
몸이 저울축  (0) 2022.03.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