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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하녀 딜시에게서 빛을 보다

by 한종호 2015. 4. 5.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15)

 

하녀 딜시에게서 빛을 보다

 

 

안녕하십니까? 모처럼 만나도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어제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학편지를 언급했지요? 조금 난해한 책이기는 하지만 저는 인간의 심성이 조금 따뜻하고 깊어지기 위해서는 미학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아름다움에 눈을 뜰 때, 그리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무위의 놀이를 즐길 수 있을 때 지금 우리를 붙들고 있는 욕망의 포박이 느슨해지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잘 놀아야 할 텐데 해야 할 일에 자꾸만 떠밀리고 있습니다. 아내는 가끔 일 중독이라며 저를 나무라기도 합니다. 시간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시간의 부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하면서도 좀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엄벙덤벙 살다보니 벌써 사순절 순례여정을 마감하고 부활절을 맞이하게 되네요.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고난과 슬픔과 연약함을 부둥켜안음으로 더 깊은 세계를 지향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광화문에서 삭발식을 거행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죽은 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해주는 게 산 자의 의무일진대 그들은 그 길이 막혀 있어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자기만족에 겨운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거추장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욕하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매스컴은 유가족들이 받게 될 보상금을 운위하면서, 일반 대중과 그들 사이를 버름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성적인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은 매스컴이 전하는 액수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어쩌면 그 정도면 됐네 뭐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지혜롭다는 말은 씁쓸하지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지혜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당장은 약삭빠른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부활절은 아마 그런 사실을 되새기는 절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꼭 떠오르는 소설이 있습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인데요, 리얼리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좀 난해하게 여겨지는 소설입니다. 오래 전에 이 소설과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대칭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그 글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잘 쓴 글은 아니지만 문제의식은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이야기를 정리해 볼께요.

 

 

 

 

소설은 요크나파토오파군()에 살고 있는 몰락한 귀족 콤프슨과 자녀들의 비정상적인 의식세계에 투영된 다양한 시간의 빛깔을 그려 보여줍니다. 집 앞에 있던 목초지마저 팔아야 할 정도로 몰락한 가장인 콤프슨은 술병을 옆구리에 낀 채 살고, 콤프슨 부인은 자기 연민에 빠져 집안일은 흑인 하녀에게 맡긴 채 침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집의 아이들(장남 퀜틴, 차남 제이슨, 막내 벤지, 누이 캐디)은 집안에서 숨을 죽인 채 살아갑니다. 비정상적인 집이지요.

 

백치인 막내 벤지는 누이인 캐디에게 맡겨집니다. 캐디는 냉소적인 아버지와 신경증적인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도발로서 만나는 모든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결국 캐디는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가족들은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캐디는 집을 떠납니다. 동생을 사랑했던 퀜틴은 캐디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이기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제이슨은 누이가 떠남으로 자기에게 약속되었던 은행 취직이 무산되었다고 캐디를 원망합니다. 벤지는 품을 상실한 것 같은 쓸쓸함에 사로잡힙니다. 벤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캐디의 떠남은 모두에게 낙원의 상실이었고, 감정적인 공허함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 형제의 복잡한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이 소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캐디에 대한 각자의 기억입니다.

 

백치인 벤지의 의식에는 시간의 선후가 없습니다. 벤지는 캐디와 함께 지냈던 아름다웠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지금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장남인 퀜틴의 의식 세계는 극도의 자의식과 지성이 착종하여 일으키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그는 시간이 흘러 캐디에 대해 느끼는 자기의 슬픔이 흐려질까봐 두려워합니다. 해결책이 있다면 시간을 멈추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자살입니다. 퀜틴은 시간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파괴된 사람입니다. 차남인 제이슨은 누이에 대한 원망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의 꿈이 누이 때문에 좌절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형 퀜틴이 그렇게 세상을 버린 후 그는 벤지와 다른 가족들 그리고 누이가 남기고 간 사생아까지 책임져야 하는 그 생의 무게를 버거워합니다. 그는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돈은 늘 부족하고 기쁨은 그에게 요원한 꿈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이지요. 그는 사생아인 조카 퀜틴(자살한 형과 이름이 같습니다)을 못살게 굽니다. 암담한 상황이지요? 콤프슨가() 사람들이 발하는 시끄러운 소리나 몸짓은 누구의 영혼에도 가닿지 못하는 고립된 영혼들의 아우성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드리워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 틈을 만드는 것은 흑인 노파인 하녀 딜시입니다. 콤프슨가에서 상식적인 사람은 외부인인 딜시 뿐입니다. 딜시는 가족들의 삶에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딜시는 어려운 일이 벌어져 사람들이 당황할 때마다 내가 하죠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쩌면 이 겨울처럼 황량하고 암담한 세상에 봄 소식을 전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어쩌면 딜시에게서 산업사회가 빚어낸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콤프슨가 사람들의 시선이 과거를 향하고 있다면 딜시의 시선은 하나님의 시간인 현재와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실은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음향과 분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장면은 부활절 예배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남들의 놀림이 두려워 백치인 벤지를 부활절 예배에 데려가고 싶어하지 않자 딜시가 말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은, 현명하건 바보건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얘기해 줘야겠어. 얼치기 백인들이나 그런 걸 상관하지. 아무도 그런 건 상관치 않는단 말야.”

 

부활절 예배에 설교자로 초대받은 사람은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쉬이곡 목사입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알파카 상의를 입고, 보통 키보다도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작은 나이배기 원숭이처럼 주름이 잡혔고 피부색은 검었습니다.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인간의 죄와 연약함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 때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변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에 대한 회상과 그 피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외칠 때 그의 몸에서는 숭엄한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쉬이곡 목사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어린양의 피를 가진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다고 외쳤습니다. 딜시는 그 소박한 말이 지시하는 영원의 세계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줄기의 눈물이 희생과 극기의 시간으로 맺어진 무수한 주름 사이를 지나, 쑥 들어간 뺨을 흘러내렸다.”

 

예배가 끝났는데도 딜시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부활의 빛 가운데서 삶의 실상을 다 꿰뚫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난 최초에서 최후까지 다 봤다나는 시초를 보았고, 이젠 종말을 본단 말야.”

 

딜시는 인간의 유한한 시간이 영원에 합류하는 걸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은 더 이상 무의미와 공허에 사로잡히지 않을 겁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이후 몰락해가는 남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이 등장한 것이 1929년입니다. 대공황 시기입니다. 작가는 미국인들이 느끼는 절망의 상황을 콤프슨가 사람들을 통해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동시에 희망의 단초 역시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점점 상식적인 사람이 사라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딜시와 같은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희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숨은 불씨를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이 이야기가 지리산가리산 정신이 없습니다. 잘 헤아려 주십시오. 무심히 걸어놓은 Murray Perahia의 바흐의 'Partitas 2, 3 & 4' 연주가 들려오네요. 이제 숨을 좀 돌려야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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