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먹는 새

한 아이가 쌀새에 대해 물었다.

“저 새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죠, 엄마? 혹시 꽃을 먹는 게 아닐까요?”(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노래>, 강은교 옮기고 엮음, 도서출판 이레, p.17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모처럼 맑은 햇빛을 보니 참 좋습니다. 마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9)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요? 가끔 삶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언덕을 넘고 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언덕이 우리를 기다리곤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꾼 꿈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께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 위에서 서서 들려주신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둘째,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땅 위의 모든 백성이 그들 덕분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내가 너와 동행하면서 너를 지켜주고 반드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감동적인 약속입니다. 큰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일상에서 직면해야 하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시간 속을 기어가야 했습니다. 시련과 고통, 서러움과 두려움을 통과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사 41:14)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처지를 빗대서 한 표현이겠지만 저는 이 속에 담긴 아픔을 읽습니다. 어린 시절,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 시골 신작로를 타박타박 걷다 보면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흙이 가라앉아 고운 바닥에 마치 들판에 난 외길처럼 긴 선이 그어진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 외줄은 지렁이가 온 몸으로 기어간 자취였던 것입니다. 흙 위를 기어간 지렁이의 자취가 왜 그리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심상 속에 또렷하게 각인된 그 이미지 탓인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구절을 볼 때마다 저는 역사의 밑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세상에는 발레리나가 몸을 솟구치듯 가뿐하고 상큼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처럼 허청거리며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짓밟히면서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거미’라는 시에서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설움과 자주 입을 맞추었다는 표현은 시인이 겪어야 했던 신산스런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으로 뻘밭을 기어가는 것처럼 살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더 고귀하고 높은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는 것, 그것이 시인의 드넓은 긍지일 겁니다. 시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의 시인들입니다.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정화하는 이들이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시인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믿음의 반대어는 불신이 아니라 숙명론입니다. 숙명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숙명론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미움을 살까 무서워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나태함입니다. 영어로 나태를 가리키는 단어는 sloth인데, 이 단어는 나무늘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무에 매달려 지내면서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사는 동물입니다. 물론 나무늘보도 급할 때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입니다.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나태는 몸이 굼뜬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메말라 활력과 생기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종의 무기력증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며 자기 일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악산 둘레길


파란 가을 하늘이 우리의 시야를 시원하게 합니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가끔 하늘도 바라보고, 나무도 바라보고, 흘러가는 강물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찰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런 느긋한 시간 경험이 우리를 신성한 시간 앞에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의 마지막 십 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괴테와의 대화>라고 하는 책은 괴테의 작품을 넘어 괴테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참 중요한 자료입니다. 물론 에커만이 괴테를 늘 경외심을 품고 대했던 것을 감안한다 해도 그 글 속에 나타난 괴테는 품격 있고 또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서 읽은 한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에커만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둥지에 들어 있는 새끼 휘파람새를 어미 새와 함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미 새는 실내에서도 쉴 새 없이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놓아주어도 다시 새끼에게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에커만은 위험과 감금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미 새의 사랑에 감동하여 괴테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괴테는 미소를 지은 채 “만약 자네가 신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네”라고 말하며 자기가 쓴 시의 한 대목을 낭송해주었습니다.

“신은 어울리게도 안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자기 안에 자연을, 자연 속에 스스로를 품어 기른다
그러므로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은
신의 힘과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괴테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신이 어미 새에게 자기 새끼 새에 관한 이와 같은 무한한 사랑의 본능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또한 똑같은 본능이 자연 전체의 일체 생물에 미치게 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지속하지 못할 게야!―그와 같이 신의 위력은 세계 어디에나 편재해 있고, 무한한 사랑은 어디에서나 약동하고 있는 것이네.”(요한 페테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곽복록 역, OLJE CLASSICS, p.142-3) 세계의 지속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 속에 불어넣으시는 무한한 사랑의 본능 덕분이라는 말에 저는 크게 감복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누군가의 덕분에 삽니다. 최초에는 부모의 사랑이 그리고 나중에는 운명처럼 다가온 이런저런 사랑이 우리 삶을 든든하게 붙잡아주는 끈이 됩니다. 괴테는 그러한 사랑을 가리켜 “편재하는 신의 상징”이라 말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본 주관식 시험 문제 중에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건 우리도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적었다고 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대답 속에는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아이의 고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게 실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설사 누가 꾸며냈다 해도 이 질문과 대답은 우리 생명이 사랑의 빚임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랑의 빚만 늘어나는 것 같아 하나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삶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겨워도 그 속에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진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 새가 혹시 꽃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묻는 아이를 보고 무지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천진함을 잃어 우리 삶이 무거워졌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생각의 무게 때문에 물속에 빠져 들어갔던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비애 속에 자꾸 잠깁니다. 도처에서 생명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데, 시름에 잠긴 채 그 사이를 절름거리며 걷는 것은 삶의 낭비입니다. 세계 교회는 창조절기 가운데  9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의 기간을  지구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는 기간으로 정했습니다. 이 기간을 지나면서 지구에 대한 문해력이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편재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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