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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불임’인가 ‘불모’인가

by 한종호 2015. 3. 31.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2)

 

‘불임’인가 ‘불모’인가

 

 

같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하는 두 가지 번역이 나올 때 일반 독자들은 퍽 의아해 한다. 그러나 같은 히브리어 문장이 그렇게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 느꼈던 그 의아함은 히브리어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로 바뀔 것이다. 열왕기하 2장 19-21절을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이 어떻게 달리 번역하고 있는지 비교해 보고 그렇게 달리 번역된 배경을 살펴보자.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19절) …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21절)”

 

“저희 성읍은 매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19절) …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같은 히브리어 본문 ‘브하아레츠 므샤칼렛’을 두고 <개역개정>은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은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히브리어 동사 ‘샤칼’의 뜻은 ‘(생명을) 빼앗기다’이다. 이 동사의 ‘피엘’ 분사형 ‘므샤켈렛’은 문법적으로 본다면 주어 ‘하아레츠(땅)’의 보어 구실을 한다. 즉 “그 땅이 불임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땅이 불임’이라는 표현은 완전하지도 않고 의미론상 걸맞지도 않는다.

 

좀더 손질을 한다면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 “땅이 불모지이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이해이다. 둘째, “땅에 사는 임신부들이 유산을 한다.” 이것은 <공동번역>의 이해이다.

 

피엘분사형은 달리 사역의 의미로도 쓰이므로 땅이 사람으로 임신능력이 없게 한다든가, 토양이 식물을 번식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하는 두 가지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칠십인역>이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땅이 사람들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아테크눈타) 하다”라고 번역하였지만, 그런 번역이 나오려면 히브리어 ‘므샤칼렛’이 아닌 ‘므샤클림’이 <칠신인역>의 대본에 있었어야 한다.

 

21절의 ‘죽음’ 역시 <공동번역>이 이해하듯 ‘사람의 죽음’일 수도 있고 <개역개정>이 암시하듯 식물의 죽음일 수도 있다. 둘 다 맞는 번역이므로 번역자는 이런 경우 자체적으로 설정한 번역 원칙에 따라 의미 결정의 단안을 내려야 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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