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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

펼치다

by 한종호 2021. 5. 27.

 


펼치다
책의 양 날개를

두 손의 도움으로
책장들이 하얗게 날갯짓을 하노라면

살아서 펄떡이는 책의 심장으로
고요히 기도의 두 손을 모은다

느리게 때론 날아서
글숲을 노닐다가 

눈길이 머무는 길목에서 멈칫
맴돌다가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내 안으로 펼쳐지는 무한의 허공을

가슴으로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이 감당이 안 되거든

날개를 접으며 
도로 내려놓는다

날개를 접은 책
책상 위에 누워 있는 책이지만

아무리 내려놓을 만한
땅 한 켠 없더래도

나무로 살을 빚은 종이책 위에는 
무심코 핸드폰을 얹지 않으려 다짐한다

내게 남은 마지막 한 점의 숨까지
책과 자연에 대하여 지키는 한 점의 의리로

하지만 내게 있어 
책은 다 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돈 냄새가 나지 않는 책
탐진치의 냄새가 나지 않는 책을 말함이다

그러한 책 속에는
사람의 손을 빌어 쓰신 
하늘의 뜻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학급문고 만들기 숙제로 주어진
책 하나를 만나기 위하여 처음으로 들어간

동네 모퉁이 작은 서점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한 그루 어린 나무가 되었다

서점 안에 있는 책들의 제목을 일일이 모두 다 
제 가슴에 비추던 중학생 그때의 마음은

오늘도 한결같아서 
고즈넉이 혼자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고

자유의 푸른 바람이 펄럭이는
하늘 냄새가 나는 그런 고마운 책에게는

자유의 날개를 펼쳐주고 싶다
내게 주신 이 작고 고마운 두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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