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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철없는 아린아이인가, 지혜의 화신인가?

by 한종호 2015. 3. 25.

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10)

 

철없는 아린아이인가, 지혜의 화신인가?

- 잘 읽어보면 제법 짭조름한 요셉 이야기(1) -

 

 

1.

 

요셉 이야기는 얼핏만 봐도 창세기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와 구별된다.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굴곡이 있는 이야기 전개가 그렇거니와 하느님에 대한 언급은 제법 등장하지만 그분이 과연 사람의 삶에 어떤 모양으로든 ‘개입’이란 걸 하는지 안 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하느님은 무(無)행동으로 일관한다. 물론 이와 같은 하느님은 야곱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선 결정적인 순간에 –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칠 때 베델에서, 그리고 타향에서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 나루터에서 – 하느님이 나타나지 않았나. 그런데 요셉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철저히 부재하다. 부재하다는 말이 마뜩치 않으면 이렇게 말하자. 하느님은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창세기 37-40장에서 유다와 다말 얘기가 담겨 있는 38장과 야곱에게 하느님이 나타난 얘기를 전하는 46장 1-7절, 야곱의 족보가 적혀 있는 46장 8-27절, 주로 야곱 얘기인 47장 28절-48장 22절, 49장 등은 요셉과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어차피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건 아니니까 여기서 굳이 따지진 않겠다. 그건 그 문제 따지길 좋아하는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자. 그것까지 따지기엔 요셉 얘기가 너무 길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너무도 많으니까.

 

요셉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다른 조상들 이야기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학자들도 일찍이 이 사실을 감지했기에 요셉 이야기를 특별하게 다뤄왔다. 이야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도 상당히 애를 먹었다. 요셉 얘기가 다양하고 복잡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있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얘기가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갖춘 한 덩어리의 수준이 높은 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런 성격을 가진 이야기는 그리 흔치 않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일련의 이야기(사무엘상 16장-사무엘하 5장)와 다윗의 왕위가 후손에게 계승되는 일련의 이야기(사무엘하 9장-열왕기상 1장) 정도가 요셉 얘기와 비슷한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 이야기는 별도로 전승되어 오던 짧은 이야기들이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편집된 이야기들과 달리 일찍부터 하나의 큰 덩어리 이야기로 전해졌다. 게다가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을 가진 짧은 이야기를 모았을 때는 편집자의 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모종의 불일치와 모순, 갈등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데 요셉 이야기에는 그런 걸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요셉 이야기는 일찍부터 하나의 덩어리로 전해졌거나, 아니면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는 편집자가 고도의 문학적, 예술적 기교를 발휘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는 게 타당하겠다. 이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다른 조상들 이야기와 구별된다 하겠다.

 

요셉 이야기의 또 다른 특징은 하느님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폰 라트(von Rad)가 이 점을 일찍이 지적하면서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을 솔로몬 시대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시대를 ‘지혜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주장은 후학들에 의해 비판받았지만 말이다.

 

하느님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거나 자연적, 역사적으로 눈이 띠게 개입하면서 사람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서술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얘기들과 비교하면 요셉 이야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이 하느님이 정말 없다고 전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거기서 하느님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거나 숨어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활동하기에 사람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거다. 요셉 이야기는 무수한 역사적 ‘우연’ 속에서도 하느님의 의도가 사람 눈에 감춰진 방식으로 성취됨을 보여준다. 요셉 이야기에는 종교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종교친화적이 아닌 거다.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돕지 않고 심지어 방해한다 해도 하느님은 꿋꿋하게 당신 뜻을 성취한다.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들은 하느님이 안 보고 있다는 듯이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자 그를 장사꾼에게 팔고는 아버지에게 버젓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실질적’ 무신론자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멍이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식으로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을 올바르게 이끌어간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섭리(providence, 더 쎄게 표현하면 ‘예정’ predestination)를 깨닫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요셉의 부모,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요셉조차 그걸 내내 깨닫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깨닫지 않는가.

 

그럼 요셉 이야기의 저자(단수를 사용하지만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전승자를 가리킨다)는 시대의 이단자인가? 수천 년 앞서 나타난 무신론자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활동과 섭리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또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화적, 종교적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도 괜찮은 상황, 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히지 않는 상황’ 속에 그가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주장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위기상황’이었을 거다. 아무 문제도 없는데 이처럼 ‘이단적’인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게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해석자가 밝혀야 할 과제가 되겠다.

 

 


<Charles Thevenin - "JosephandhisBrothers">

 

2.

 

요셉 이야기를 요약해보자. 야곱의 아들 중에 요셉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야곱이 그를 다른 자식들보다 더 사랑했단다. 그를 편애했으니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고 질투한 건 당연했다. 그를 늘그막에 얻었기 때문이라는데 좌우간 부모의 편애가 가정 비극의 씨앗이 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요셉에게만 남달리 화려한 옷을 입혔다는데 아버지는 그게 요셉을 어떤 상황에 빠뜨릴지 정말 몰랐을까?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막 굴리라 했거늘….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꿨는데 이게 참말로 요상했다. 그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비슷한 꿈을 꿨는데 이를 풀어보면 훗날 요셉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의 지배를 받는다는 거였다.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요셉은 꿈 얘기를 형들에게 자랑삼아 했다니 형들이 왜 그를 더 미워하지 않았으랴.

 

하루는 야곱이 양을 치는 형들에게 요셉을 보냈다. 물어물어 형들을 찾아간 그가 멀리서 오는 걸 형들이 보고 기회다 싶어서 그를 죽이기로 공모한다. 그가 밉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죽이기까지야 싶은데 좌우간 그랬단다. 그들은 요셉을 죽여서 구덩이에 던져 넣고 아버지에게는 동생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말하기로 입을 맞췄다. 이때 맏아들 르우벤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요셉을 죽이진 말고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제안한다. 설화자는 르우벤이 나중에 그를 건져내서 아버지에게 돌려보낼 요량이었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역시 설화자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어쨌든 그렇게 합의가 이뤄져서 형들은 요셉의 트레이드 마크인 화려한 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쳐 넣었다. 거긴 물이 없었다니 그냥 두면 얼마 안가서 죽을 목숨이었다. 형들은 그런 짓을 하고 나서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아무리 이복 동생이지만(동복 형제들도 끼어 있었다!) 그런 짓을 하고도 밥이 넘어가나 보다.

 

다행히 상인 한 무리가 거길 지나갔다. 형제들은 유다의 제안대로 은 스무냥을 받고 요셉을 그들에게 판다. 이 돈은 누구 손에 들어갔을까? 나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데 고대 해석자들은 이걸 갖고 이러저런 추측을 했다. 이때 르우벤은 어딜 갔었는지 나중에 사실을 알고 옷을 찢고 통곡했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들은 숫염소 한 마리를 죽여서(공연히 죽은 염소에게 평안한 안식이 주어지기를!)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발라 아버지를 속인다. 야곱은 편애하는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요셉은 보디발이라는 이집트의 관리에게 팔린다.

 

똑똑한 사람은 어딜 가도 두각을 나타내는 법, 요셉은 곧 주인의 눈이 띤다. 설화자는 이를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39:2)고 말하지만 여기서도 야훼는 요셉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는 승승장구해서 보디발 집안의 넘버2가 됐는데 ‘호사다마’라고, Mrs. 보디발은 이 잘 생기고 일 잘하는 종을 그냥 두기가 아까웠는지 그에게 추파를 보내면서 자기 침대로 가자고 꼬였단다. 하지만 우리의 요셉이 누군가, 그는 Mrs. 보디발의 끈질긴 유혹에 안 넘어가고 ‘정조’를 지켰다. 결국 Mrs. 보디발은 강제로 그를 추행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오히려 그에게 죄를 덮어씌운다. 그가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말이다. 요셉은 억울했지만 그때 집엔 두 사람 밖에는 없었다. 증인이 없었던 것이다. 하긴 증인이 있었다 해도 누가 일개 종의 편에 섰겠냐마는…. 그가 넘버2라지만 넘버1의 아내를 어떻게 당하겠는가, 결국 그는 투옥되고 만다. 넘버2의 운명은 이렇듯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요셉의 감방동료 중에 파라오의 술 시종장과 빵 시종장이 있었는데 요셉은 그들이 꾼 꿈을 해몽해준다. 술 시종장은 요셉의 해몽대로 출옥하여 복직됐고 빵 시종장 역시 그의 해몽대로 죽는다. 술 시종장은 요셉에게 큰절을 해도 부족했지만 변소 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고 그는 요셉을 까맣게 잊고 만다.

 

꿈이 이토록 큰 역할을 하는 얘기가 구약성서에서 이것 말고 또 있을까, 이번엔 파라오가 꿈을 꿨는데 이집트에선 그 꿈을 풀어줄 현자가 없었단다. 그때서야 비로소 술 시종장이 요셉을 떠올렸고 그는 우리 예상대로 파라오의 꿈을 멋지게 해몽한다. 그는 7년 풍년에 7년 흉년이 이어질 걸 예언하고서 대비책까지 일러줬단다. 이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놀라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장신구를 달아주며 그를 넘버2의 자리에 앉힌다. 넘버2의 지위와 화려한 옷은 피할 수 없는 요셉의 운명이런가….

 

기근이 가나안까지 휩쓸었다. 야곱 집안에도 먹을 게 떨어져서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야 했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야곱은 막내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다. 이집트에 당도한 형제들은 요셉 앞으로 이끌려가서 그에게 절을 한다. 일찍이 요셉이 꾼 꿈이 성취된 것이다. 하지만 형제들은 자기들이 팔아먹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반면 그들 손에 죽을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노예로 팔렸던 요셉은 그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때린 놈은 잊어도 맞은 놈은 기억한다더니 말이다. 요셉은 형들을 짐짓 스파이로 몰아 투옥했다가 그들 중 시므온을 인질로 잡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돌려보낸다.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말이다. 그들 손엔 양식과 양식 값으로 받은 돈을 들려서…. 형제들이 귀가 길에 이를 알고 놀라 자빠질 뻔한 건 당연한 일이고.

 

자초지종을 들은 야곱은 요셉과 시므온과 베나민까지 잃게 됐다며 걱정했지만 다시 양식이 떨어지자 결국 아들들을 이집트로 다시 보낸다. 인질로 잡혀 있는 시므온과 이번엔 데려갈 베냐민의 무사귀환을 약속하는 맏아들 르우벤에게 설득됐다지만 우선 먹을 게 없으니 야곱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형제들은 베냐민까지 데리고 이집트로 떠난다. 요셉과 형제들이 재회하는데 여기서 요셉은 또 다른 계책을 쓴다. 귀향하는 베냐민의 짐 속에 자기 술잔을 넣어둔 다음에 그를 도둑으로 몰아세운 거다.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린 막내를 살리고자 유다가 선뜻 나서서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애원하자 그때서야 요셉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내가 형들이 종으로 팔았던 요셉입니다!”라며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 다음엔 모두 예상하듯이 서로 얼싸안고 울었고 결국 아버지 야곱까지 이집트로 모셔 와서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다.

 

3.

 

우리에겐 뻔한 얘기다. 얘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끝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안 그런가? 한 마디로 식상한 얘기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가 식상할까? 왜 뻔한가 말이다. 그 까닭은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의 교훈을 담고 있는 비슷한 얘기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듣고 읽었다는 데 있지 구성 자체가 허접하기 때문은 아니란 말이다. 만일 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다면 손에 땀을 쥐고 들었을 거다. 익숙해서 그렇지 이 얘긴 상당한 수준의 문학 작품이란 말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구약성서에 이 정도의 수준을 갖춘 긴 이야기가 흔하지 않다. 대개는 독립적으로 전해진 단편적인 얘기들이 가급적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연결되어 긴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잘 읽어보면 그게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셉 이야기는 처음부터 큰 단위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얘기들과 구별된다.

 

요셉 이야기에서 오랫동안 학자들을 괴롭혀온 주제는 과연 이게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얘기냐 아니면 꾸며낸 얘기냐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우리네 삶에는 이보다 훨씬 더 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현실성에 부족해서 꾸며낸 얘기로 보는 것 아니다. 하지만 얘기의 흐름이나 구성으로 보아 어떤 교훈을 전할 의도를 갖고 만들어졌다고 보는 거다. 너무나도 아귀가 잘 맞기도 하거니와 어떤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얘기를 몰아가고 있으니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는 꾸민 얘기가 아니냐는 거다.

 

양비론은 적지 않은 경우 ‘비겁한’ 행위일 수 있다. 판단을 유보하니까 말이다. 성서가 실제 일어난 역사인 것처럼 전한다고 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실제로 일어난 역사라고 강변하는 것도 문제지만, 성서의 역사성에 대해 전반적으로 불신하면서 역사적 핵심이 들어 있는 얘기조차 무조건 꾸며낸 얘기로 치부하는 것도 문제다. 오히려 두 극단을 피하고 넘어서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적 사실이면 어떻고 꾸며낸 얘기면 어떤가. 둘 다 어떤 교훈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전승됐을 터이니 우린 그 교훈이 뭔지를 파고 들어가는 데 집중하면 그만 아닌가 말이다.

 

이 특이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읽는 일은 다음번 글에서 시작해보겠다. 요셉 이야기는 워낙 덩어리가 크니까 앞으로 두 번 더 써보겠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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