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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막막함을 몰아내 주소서

by 한종호 2021. 5. 20.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절기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요 14: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영에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갈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시대이기에 우리는 더욱 영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센 물결처럼 우리를 휘몰아치는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에게서 분별력을 앗아가곤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누구인지, 소명이 무엇인지, 푯대가 무엇인지를 다 잊어버리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며 인생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을 앞두고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기도문을 소리 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주님, 위로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 주소서. 위로를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시간, 영적인 무기력의 시간에도 당신께 신실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능력과 기쁨과 신뢰의 영,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성숙해 가는 영, 당신의 아버지를 기쁘고 힘차게 찬양하는 영, 고요함과 평화의 영을 주소서. 신앙의 암울, 암흑, 혼란, 저속하고 세속적인 관심, 절망적인 불신, 나태, 슬픔, 버림받은 느낌, 분열, 그리고 신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막막함은 몰아내 주소서.”(<칼 라너의 기도>,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150)

이 기도문을 한 호흡으로 읽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지금 우리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오. 시편 기자들은 인생의 고빗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주님은 나의/나를 ~’. ‘~’의 자리에 들어가는 표현에 주목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반석, 요새, 건지시는 분,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목자, 도움, 피난처, 은신처, 능력, 노래, 견고한 망대, 분깃, 빛 등이 떠오릅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표현에만 주목하지 않고, 이런 고백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경험을 떠올려 보곤 합니다. 신산스러운 삶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터전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반석’처럼 든든하게 지탱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 번민해 보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피할 바위’라고 고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고 도처에 도사린 위험 때문에 울어보지 않았다면 ‘목자’로서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에 처해 본 적이 없다면 우리 발 앞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고맙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위의 기도문에 등장하는 암울, 암흑, 혼란, 저속하고 세속적인 관심, 절망적인 불신, 나태, 슬픔, 버림받은 느낌, 분열, 막막함 등은 우리와 무관한 현실이 아닙니다. 지금 인생이 참 좋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의 시간이 지나가면 어둠의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게 우리 인생의 경험입니다.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의미와 무의미가 시도 때도 없이 갈마들면서 우리 인생의 무늬를 만듭니다. 행복하고 좋은 기억보다 우리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개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험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인생의 계기들을 찬찬히 살피며 그것을 오히려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빛을 비춰달라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월요일 오전, 몇 가지 강의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대개 옹근 시간을 해야 하는 일은 월요일에 하는 편입니다. 월요일은 어떻게 보면 목회자들의 안식일과 같은 날인데 언제부터인지 저는 밀린 일을 하는 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제가 할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조금 머리도 무겁고 답답하기도 했는데, 늘 후생가외(後生可畏)의 마음으로 대하는 후배 목사님이 함께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일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냉큼 그렇게 하자고 답하고는 약속 장소인 월드컵공원역에 갔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밝은 햇살이 언뜻 비치기도 했건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기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하늘공원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흠뻑 비를 맞은 나무들은 서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인적은 드물었습니다. 메타세콰이어가 줄지어 늘어선 흙길을 우중에 걷는 기분이 참 상쾌했습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고 일상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좋은 풍경과 만날 수 있는데, 지금까지 너무 게을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각기 달랐지만 서로의 진심과 진정을 알기에 대화는 편안했습니다. 그는 어떤 일을 요구받을 때 자기가 감당할 일이 아니다 싶으면 세 번까지는 거절하지만, 그래도 요청이 계속되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가끔은 과중한 일로 지치기도 하지만 그분이 하라시는 일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게 부름 받은 이들의 생이 아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공감을 하는 한편, 나 자신이 느끼는 한계에 대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마 23:8, 10) 하신 말씀이 제 가슴에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가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한 말이 떠오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횡행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에도 멀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일찍이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말들이 제집을 잃고 떠돌고 있는 시대의 어둠을 직시했습니다. 참된 말에 대한 그리움이 날로 깊어갑니다.

“말들이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다니는 것을 보면 볼수록 그의 기다림은 더욱더 깊어져 가고만 있었다. 고향을 잃어버리지 않은 말, 가엾게 떠돌지 않는 말, 그가 태어난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리지 않은 말, 그가 태어날 때 지은 약속을 벗어 버리지 않는 말, 유령 아닌 말, 그는 아직도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이청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중 ‘떠도는 말들’, 문학과 지성사, 1981, p.28)

이청준 선생은 ‘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소설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말들, 실체 없는 말들, 실체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말들의 운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허공을 떠돌면서 저희끼리 자유롭고 음란스런 교미를 즐기다가 그것이 지치고 나면 아무 때 아무 곳이나 깃들여 쉴 곳을 약탈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당해 온 학대와 사역에 대한 무서운 복수를 음모한다”(이청준, 앞의 책, p.65).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 벌써 40년이 지났지만 떠도는 말들은 제집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더 맹렬하게 세상을 휩쓸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참말을 듣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가슴 속의 속말을 털어놓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광천변을 걸을 때는 비가 그쳐 있었습니다. 이미 큰 물이 지나갔는지 천변의 풀들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습니다. 팔뚝만한 잉어가 흐름을 거슬러 천천히 유영했고, 새끼들과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는 오리 가족도 정겨워 보였습니다.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왜가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원앙도 보였습니다. 모두 생명의 세계에 초대받은 멋진 손님들이었습니다. 두어 시간 길을 걷는 동안 구름이 걷히듯 마음의 울울함이 스러졌습니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 속에 치유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배 목사님은 얼마 전 어느 건물의 조그마한 옥탑 공간에 새로운 예배처소를 마련했습니다. 아담한 공간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의자라야 불과 25개에 불과했지만, 그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꿈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강대상 뒤편의 비좁은 공간에 걸린 배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문구가 묘한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하나면 그만이지요. 삶이 아무리 힘겹더라도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지 벌써 41년이 되었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역사의 제단 앞에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야 합니다.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운동에 우리가 무심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런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미얀마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쟁과 같은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입니다.

예고해 드린 대로 이번 주일에는 예배 중에 성찬식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성찬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찬의 의미를 함께 되새기고, 정성을 다해 준비해 주십시오. 기도의 마음으로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고, 가장 정갈한 보로 덮어놓으십시오.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그 전례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과 깊은 일치를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모든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5월 2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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