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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우리집 복순이가 무서운 쿠팡맨

by 한종호 2021. 5. 12.



우리집 대문에는 열쇠가 없다. 대신 못 쓰는 비닐 포장지를 꼬깃꼬깃 접어서 문틈에 끼워두면, 아무렴 태풍이라 해도 대문을 덜렁 열지 못한다. 

바로 옆집과 앞집에는 cctv까지 설치해 두고서 대문을 꽁꽁 걸어 잠궈두고 있지만, 우리집 마당에는 낯선 낌새만 채도 복순이와 탄이가 골목이 떠나가라 시끄럽게도 집을 지킨다. 이 점이 이웃들에겐 내내 미안한 마음이지만, 다들 별 말씀은 안 하신다.

대문을 열쇠로 잠그지 않는 이유는 배송 기사님들이 다녀가시기 때문이다. 부재시 따로 맡길 장소가 없다 보니, 예전엔 담을 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대문을 열쇠로 잠그지 않고, 그 옛날집들처럼 엉성한 잠금 장치를 둔 것이 비에 젖어도 괜찮은 비닐 포장지인 셈이다. 

기사님들은 그냥 대문을 살째기 밀고서 들어오시면 된다. 그리고 나가실 때, 본래대로 꼬깃한 비닐을 문틈 사이에 끼워두시는 것도 다들 잊지 않으신다. 

전날에 쌀독에 쌀이 떨어져 옹기 항아리 밑바닥이 보이길래, 남편에게 전달을 하니 온라인으로 쌀 주문을 해놓은 것이다. 바보 같지만 나는 이적지 온라인 주문을 할 줄을 모른다. 

배송 기사님은 개가 하도 짖어서 대문 안에 못 들어간다는 전화 한 통 남기시곤, 쌀 20kg을 대문 안이 아닌, 대문 밖에 세워두고서 사라지셨다고 한다. 그렇게 밤까지 쌀자루가 든 택배 박스는 대문을 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골목길 가로등 불빛에 어슴푸레 비춰보아도, 종이 박스를 포장한 모서리들이 영 엉성한 것이, 곳곳에 테이프가 벌어져 있길래 살짝 벌려서 보니, 바닥에 고꾸라져 있던 쌀가마 입구 한쪽이 터져 있고, 하얀 쌀알이 쏟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 마침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혹시 택배 박스를 열어보았더냐고 물으니 손도 안댔다고 한다. 그런데 낮에 집 안에 있으면서, 택배 기사님이 다녀가시는 것도 보았고, 참새들이 모여드는 것도 다 보았다고 한다. 

놀란 가슴에 혹시 참새가 박스 틈새로 들어갔더냐고 물으니, 그냥 박스 밖에만 모여있더란다. 그래서 "그 참새들 참 영리하네!" 했다. 보이지도 않는 그 박스 속에 쌀알이 있었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보다 신통하기도 하다며. 자연에는 여전히 인간의 의식이 닿지 않은 신비의 영역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저녁 바람처럼 가슴께를 스치니 겸손한 마음이 인다.

순간 배송장을 확인하고 배송 기사님께 전화를 걸어볼까도 했지만, 쌀가마 입구가 터지거나 말거나, 쌀이 쏟겨진 곳은 그나마 박스 안이니까, 쌀에 참새나 쥐만 다녀가지 않았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앞선다. 

 

 

20kg 쯤은 아이 하나 번쩍 들어서 안는다는 마음을 내면 무거운 무게가 아니다. 쌀이 더 쏟기지 않도록 쌀자루를 세워서 먼저 안으로 옮기고, 박스 안에 쏟긴 쌀은 그냥 버릴까 하다가 양이 제법 많길래, 박스를 조심스레 기울여 양재기에 쏟아 담아보았다. 돌이 섞이진 않았을까 혹시 작은 벌레가 기어나오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살펴보니, 방금 쌀독에서 막 퍼낸 쌀 같다. 

우리집엔 쌀 뿐만이 아니라, 계란과 두부까지도 새벽 배송을 받기도 한다. 따로 장을 보러갈 시간도 아끼고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이렇게도 참 편리한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는 있지만, 일회용품 쓰레기를 달고 오는 택배 물품들이 도착할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는 무거운 돌을 하나씩 얹어 놓는 듯하다. 이처럼 편리하고 빠른 삶의 방식으로 인해 이 땅에 빚을 지고 있다는 부채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주위에서 들은 소식통에 의하면, 이런 경우에 쿠팡에 전화 한 통이면, 밑이 터지지 않은 멀쩡한 쌀을 다시 보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주문의 편리함에 더해지는 그 서비스의 무한 책임감 밑에 깔렸을 저들의 속뜻을 슬며시 밀어내며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인다. 

당장 내 눈 앞에 드러나 보이진 않지만, 당장 나에게 플러스가 되는 물적 서비스가,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겐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라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을 이루는 물적 자원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선현들의 말씀이 늘 가슴으로 샘물처럼 흐른다. 현재 대한민국을 삼키듯 점령하고 있는 쿠팡과 배민의 손길에서 자유로운 지역이 어디 있을까? 나는 그곳이 영혼의 숨통이 트이는 자유의 영토일 것만 같다.

이 참에 말이 나온 김에, '배달의 민족'이라는 이름자에 대해서, '배달'은 크고 밝다는 뜻인 '한'의 옛말이다. 그 고귀한 본뜻을 퇴색시킨 듯한 브랜드명이 한반도의 변두리 사람인 이 사람의 마음에는 미덥지 못하다. '이순신'이란 훌륭한 이름을 우리 후손들이 자녀들의 작명으로 잘 짓지 않는 이유는 그 이름자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리라. 

국민적 동의 없이 국가적 차원의 명예로운 이름을 차용한 이 브랜드명이, 이토록 고귀한 본뜻인 '크고 밝다'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려면, '배달'의 본뜻을 실천하는 길인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곧 세상의 모든 만물을 널리 이롭게 하며, 자연의 이치와 순리대로 살아가는 세계를 만드는 참된 기업이 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두고두고 그만큼 사회에 끼치는 공헌도와 영향력이 하늘 만큼 크고 밝아야 할 것이다. 

그 옛날 전세계를 지배하려던 알렉산더 왕의 야욕과 정복욕을, 쿠팡과 배민에서도 겹쳐져서 보이기도 한다. 전세계와 나라를 제국·식민주의로 만들려는 야욕은 파괴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대량 소비와 개발로 인해 지구의 유한 자원을, 가장 빨리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다름 아닌 편리함과 빠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편리함과 빠름이라는 노선에서 가끔씩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이런 마음일 수 있다면, 직통과 직선의 편리함이 아닌 구불구불 불편함과 곡선이 주는 삶의 미학을 선택하려는 마음, 빠름과 풍요함이 아닌 느림과 가난이 주는 정신의 맑음을 선택하려는 마음 말이다. 

소로우와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그런 간소함과 단순함이 낳는 삶의 진실성과 선함과 아름다움, 그런 조화롭고 균형 있는 삶이 결국에는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인간의 길, 자연의 이치라는 생각을 하면서 쌀을 씻는다. 

그리고 어깨를 짓눌렀을 쌀가마가 든 택배 박스, 그 무거운 짐을 힘에 부쳐 한순간 떨어뜨리듯, 땅에 내려놓으며 한 숨 돌리자마자 또 로켓처럼 내달렸을, 쿠팡맨의 하얀 한 숨을 생각하면서, 오늘 저녁에도 평화의 쌀을 씻으며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저녁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한 말소리,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손주들이 평소에 할아버지로부터 내내 들었다는 가장 기억에 남는 참된 가르침이 하나 있다. "아껴라, 아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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