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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시리고 아픈 사랑

by 한종호 2021. 5. 6.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찬송가 559장 1절)

아름다운 5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로 이어지는 5월의 첫 주간입니다. 뭔가 기대를 품은 아이들의 눈빛이 귀엽습니다. 꽃 가게마다 카네이션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교회에서 보내준 선물 상자를 개봉하며 신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과 기쁨은 어른과 아이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환청처럼 제 귀에 낭랑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비 개인 아침 공원을 천천히 걷다 보면 이 가사가 실감이 납니다. 나무 그늘 밑을 걸을 때면 마치 초록빛이 몸과 마음에 배어드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 말입니다.

간밤에는 모처럼 꿈을 꾸었습니다. 제주도의 오름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길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두런두런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교우들 몇 분이 뒤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자, 언덕 저 편에서 많은 교우들이 즐겁게 놀고 계셨습니다. 소풍을 나온 것처럼 유쾌하게 담소하는 이들도 있고, 배구공을 가지고 놀고 계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 입이 벙싯 벌어지는 찰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가 집합 금지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를 유지하세요”라고 외치려다가, 잠시라도 그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꿈에서라도 여러분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이게 꿈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 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미묘한 것이 또 있을까요? 도종환 시인의 <새의 사랑>이라는 시는 한 생명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시인은 나뭇가지 위에 지은 둥지에 앉아 처연히 비를 맞고 있는 새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새끼들이 비에 젖을세라 두 날개로 꼭 품어 안고 쏟아지는 비를 다 맞는 새의 모습이 시인의 가슴에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새들도 저렇게 새끼를 키우는구나" 생각하니 숙연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미 새의 사랑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새들의 깃털이 돋아나고 마침내 나는 법을 가르쳐야 할 때가 오자 어미 새는 조금 떨어진 옆 나무에 벌레를 물고 앉아 새끼들이 제 힘으로 날아올 때를 기다렸습니다. 새끼들이 노란 부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울어대도 제 스스로 날아올 때까지 어미는 숲 어딘가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덜 자란 날개를 퍼덕이며 떨어지다가 가까스로 날아오르자 어미는 새끼 새의 입에 벌레를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미 새의 사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시의 마지막 연을 직접 들어보시지요.

"새끼들이 스스로 먹이를 구할 만큼 자라고
숲 그늘도 깊어가자 어미새는 지금까지 보여준
숲과 하늘보다 더 먼 곳으로 새끼들을
멀리멀리 떠나보내는 거였습니다
어미 주위를 맴돌며 머뭇거리는 새들에게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정을 접는 표정을 보이는 거였습니다
사람이나 새나 새끼들을 곁에 두고 사랑하고픈 건
본능일 텐데 등을 밀어 보내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눈물도 보이지 않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사랑하기에 어미 새는 새끼들을 멀리 떠나보냅니다.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어미는 새끼를 독립적 존재로 키우고 싶은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을 줄여주고 싶어서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 사랑이 아니라 자식 망치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버릇이 든 사람들은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진짜 효도는 부모보다 더 큰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 뿐만 아니라,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책임에 응답할 줄 아는 것 말입니다.

 

사진/김승범


어버이주일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떠올랐습니다. 교회 역사는 그를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고 현숙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그가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은 ‘피에타’라는 도상을 통해 마리아의 슬픔을 드러내려 노력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피에타상’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 모두가 겪고 있는 슬픔이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는 소식을 들은 이후 마리아의 삶은 더 이상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삶일 수 없었습니다. 성령 잉태, 파혼의 위기, 초라한 출산, 애굽으로의 피신, 나사렛으로의 귀환과 가난한 삶, 맏아들 예수의 가출, 예수가 귀신 들렸다는 소문, 십자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말 그대로 간난신고(艱難辛苦)였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드문드문 등장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후 처음 찾아온 목자들은 자기들이 겪은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을 다 사람들에게 고하였습니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천사들의 전갈, 그리고 천군 천사가 함께 부르던 영광의 노래. 누가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 속에 곰곰이 되새겼다”(눅 2:19)고 전합니다. ‘고이 간직함’, ‘곰곰이 되새김’이야말로 어머니의 마음일 겁니다. 자식에 관한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흘려버릴 수 없는 마음 말입니다.

아기의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을 때 마리아는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던 경건한 노인 시므온을 만납니다. 성령에 감화된 시므온은 아기를 팔로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찬양 후에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아기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눅2:34b-35)

아기가 사람들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리라는 것, 비방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을 겁니다. 그 아기의 일로 인해 마리아는 평생 마음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마리아만이 아니라 모든 어머니들이 겪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자식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신의 아픔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어머니이니 말입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축제의 번잡함에 휩쓸리며 지내다가 쫓기듯 도성을 벗어나 하룻길을 가다가 비로소 아들이 일행 가운데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리저리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선생들 가운데 앉아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예수를 발견합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게 무슨 일이냐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고 말하자 예수가 대답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눅2:49)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는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확연하게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성년에 이르러 아버지를 도와 목수로 일하며 가정을 건사하던 예수가 집을 떠나 곳곳을 유랑하기 시작했을 때 마리아의 마음은 또 한 번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닷가 마을을 떠돌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를 보고 사람들은 그가 귀신에 들려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후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찾아갑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바깥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예수가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 3:33, 35)

어쩌면 어머니의 가슴에 못이 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태에 깃든 생명이었지만, 더 이상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인식했을까요? 새끼 새를 숲에서 밀어내는 어미 새의 마음과 같았을 겁니다. 시므온의 예언 그대로였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아팠습니다. 그래도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 길의 끝인 십자가에서 예수는 직접 어머니에게 말을 건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 19:26). 사랑하던 제자에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며 한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는 불효자입니다. 부모의 가슴에 아픔만 안겼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효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 가장 큰 정신의 모습을 이뤘으니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어느 정도는 또 다른 마리아들입니다. 자식에 관한 말 혹은 자식이 한 말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그 마음이야말로 제2의 잉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가없는 사랑과 인내가 큰 정신의 모태가 됩니다. 참 고맙습니다.

가족 간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사정이 저마다 다르기에 뭐라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가정에는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사랑의 마음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인내하는 사랑, 관용과 용서의 용기를 발휘하면 좋겠습니다. 교우님들의 가정마다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샬롬.

2021년 5월 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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