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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영원히 청년의 영으로”

by 한종호 2015. 3. 22.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3)

 

“영원히 청년의 영으로”

- <청년의 종교> 1932년 6월/ <금후의 조선기독교> 1936년 2월 -

 

 

내 이름은 ‘소영’이다. 물론 한자어의 뜻은 다르지만 발음에서 착안하여 영어권 사람들을 만나면 늘 내 소개를 이렇게 한다. “I’m so~young~(저는 정말 젊어요)” 모두가 한바탕 웃는다. 중년이 되어버린 요즘엔 그 웃음소리가 더욱 크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을 기다렸다가 기어코 덧붙이는 한마디가 있다. “And, I want to be forever~young~(그리고 영원히 젊고 싶어요.)”

 

젊어 보이는 동안 얼굴이 대세라는 요즘에 나이보다 어려보이겠다는 욕심은 아니다. 사는 동안 나이와 상관없이 젊고 싶은 것은 내 영이고 내 신앙이고 삶을 살아가는 내 자세이다. 나는 이것을 김교신을 비롯한 무교회 신앙인들에게서 배웠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동인이었던 함석헌은 무교회 정신을 “영원히 청년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부른바 있다. 김교신도 이에 동의했다. 어느 날, 종교를 논평하는 이가 ‘기독교는 청년에게 적당하다’고 논한 글을 접하고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혹은 그럴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한번 노쇠하여 버리면 다시 기독교에 돌아올 수 없다 함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 기독교는 특히 ‘청년의 종교’라는 사실이다. 이해에 담박하고 정의에 용약함은 이것이 청년의 넋이요, 인습을 물리치고 진리에 취하며 허위를 깨뜨리고 실질을 취하려 함은 청년의 의기요, 과거의 경험 속에 지구(脂垢)로써 신경을 은폐치 않고 예기발랄한 감수성으로 진위허실을 판별하는 것이 청년기의 본능이 아닌가.”

 

여기서 ‘노쇠함’이란 육체적으로 늙음이나 정신적으로 완숙해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김교신이 기독교의 청년성을 논하면서 언급한 위의 내용들을 뒤집으면 그가 말한 ‘노쇠함’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설명과 이해에 구구절절 자기를 드러내는 사족이 많고, 정의로운 일임을 알면서도 이미 가진 기득권을 상실할까봐 은근슬쩍 뒤로 빼며, 어느덧 몸에 익숙해진 습관은 그것이 거짓된 것인지의 판단 없이 고수하여 현재의 유익함을 취하려는 태도를, 김교신은 ‘노쇠함’이라고 불렀다. 마치 좋고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고 혈관에 쌓여 혈류를 방해하는 지방층처럼, 과거의 경험들이 지성과 감성, 신앙의 예민한 감수성을 가로막는 ‘기름찌꺼기(지구)’가 되어 있는 상태가 또한 ‘노쇠함’이라 했다.

 

 

                            류연복 판화

 

 

기독교의 본질이 ‘영원히 젊으려는 정신’이라면 돌아볼 일이다. 김교신의 시대로부터 80여년이 지난 현재의 기독교는 과연 ‘청년성’을 가지고 있는가? 비평하기 좋아하는 외부인의 눈으로 볼 때나 신앙인의 본질이 ‘청년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인이 볼 때도, 오늘의 기독교는 여전히 젊은가? 한 때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도 ‘늙으매’ 그 아들들의 부당하고 불신앙적인 행동들을 제지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대부분의 사사들이 죽기까지 하나님의 영과 소통하며 말씀을 ‘맡아’ 예언(預言)을 했었는데, 그가 아직 사사이던 시절에 여호와께서는 엘리에게 말을 그치시고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지 않았던가? 엘리 가문의 ‘영적 노쇠함’을 경고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감 없이 용감하게 전했던 ‘어린’ 사무엘은 이후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짐이 없을 만큼 여호와의 영과 함께 했었다는데, 그 역시 ‘늙으매’ 모자라기 짝이 없는 자신의 두 아들을 ‘관습’처럼 대를 이어 사사로 삼는 죄를 범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성서는 끊임없이 이 ‘영적 노쇠함’을 경고하고 있는 텍스트이지 싶다. 늘 새롭게, 하루하루 만나처럼 받는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어찌 ‘늙음’이 자리할 수 있을까? 어찌 ‘관례’에 눈감고 ‘인습’을 전통이라 고집하고 ‘진리’를 독점한 양 행동할 수 있으랴! 늘 배우고 또 배우는 겸손한 어린 아이처럼, 모든 것이 투명하고 분명하며 밝히 납득되어야 고개를 끄덕이는 순수한 아이처럼, 무엇보다 아버지 되시고 어머니 되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늘 아이 같은 자세로 임하려는 신앙인은 결코 늙을 수 없다.

 

“기독교가 청년의 종교인 동시에 기독교는 청년으로 하여금 영원히 청년으로 머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진실로 기독교 신자일진데 저는 비록 고희를 넘을지라도 오히려 청년일 것이다. … 우리는 초국 현인 노래자가 70에 오히려 오채의(五彩衣)를 입고 친전(親前)에서 영아희(嬰兒戱)를 떨었던 것처럼,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청년일 것이다.”

 

우리가 자라 세상만사에 익숙한들, 세상 지식에 성숙한들, 하여 고희에 이른 현자처럼 세상 사람들 앞에서 ‘어른’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존재가 된들, 하나님 앞에서야 어찌 ‘어른’ 행세를 할 수 있겠는가? 노래자가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렸듯이, 하나님 앞에 매 순간 서야하는 신앙인에게 ‘영적 노쇠함’은 불효요 불신앙이다. 하여 기독인이라면 어쩔 수 없다. 영원히 젊을 수밖에, 영원히 ‘청년성’을 가지는 수밖에, 하여 청년의 특성인 담백함과 용감함과 진리를 추구함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세상의 ‘노쇠함’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내는 수밖에….

 

김교신과 그의 동인들이 유난히 ‘이성적 기독교’를 주장했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서의 핵심 메시지와 조선의 근본적 문제점을 날카롭고 예민하게 분석·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은 까닭에, 조선의 기독교는 “성신이라는 미명의 열만 돋우고 이성의 상궤(常軌)를 억압한 데서 발생하는 일종의 유행성 열병”같이 되어버렸다고 한탄을 하였다. 이런 모습의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기독교적 무당”이라는 서슬 퍼런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과거는 그대로 가하다. 오순절의 성신강림이 없었다면 초대 기독교의 원기를 못 보았을 것이요. 20세기 벽두의 대부흥이 없었다면 반도 영계의 오늘이 없었을 것이요, 사람이 성신으로 인하여 중생함이 없으면 예수를 주로 믿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외치노니 “금후 50년은 이성의 시대요, 연구의 시대라”고. 식염주사 같은 부흥회로써 열을 구하지 말고 냉수를 끼쳐서 열을 식히면서 학도적 양심을 배양하며, 학문적 근거 위에 신앙을 재건할 시대에 처하였다.”

 

김교신이 말하는 ‘이성적 연구’라 함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나 신앙 없는 세속 학문연구방법론을 도입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이성적 연구 역시 “은혜로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학문과 신앙이 완전히 합금을 이룬 것이라야 금후에 닥쳐오는 순교의 시대에 능히 견디어 설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어쩌면 그의 우려처럼 향후 50년 동안 진행했었어야할, 진리를 탐구하는 청년의 열정과 순수성과 이성을 생략한 까닭에, 우리는 오늘날의 ‘노쇠한 기독교’를 대면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한국 기독교를 다시 팔팔한 젊은 정신으로 살려낼 임계점은 이미 지났다는 비관적인 진단들이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 현재 드러나는 현상만으로는 부인하기 힘든 정황이다. 그러나 김교신의 외침으로부터 80년이나 지나서, 이 늦은 시점에도 소망을 담아 사랑을 담아 다시 외치고 싶다. 기독교는 청년의 종교다. 영원히 젊으려는 종교다. 인간의 것들을 절대화하고 영속화하려는 그 모든 교만과 탐심과 자만에 ‘영원히 저항하는 정신’이다. 그러니 기독인이여 늙지 말자, 젊자, 영원히 ‘청년성’을 가지자!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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