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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평범한 행복의 꿈을 내려놓고

by 한종호 2021. 4. 2.


“내적 자유와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 땅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잡으십시오.”-브루더호프 공동체 설립자 하인리히 아놀드

그리스도의 자비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우리는 사순절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늦추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하여 잿빛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계절의 흐름은 이렇게 유장하건만 사람 홀로 유정하여 희망과 절망 사이를 분주하게 오갑니다. 가만히 꽃 앞에 멈추어 서면 우리 속에서 들끓던 소리가 비로소 잠잠해지고 결삭은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듭니다.

지난 40일 동안 늘 책상머리에 두었던 사순절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실천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위 아래 두 줄로 되어 있는 실천 과제 가운데 밑에 기술된 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장바구니 사용하기’, ‘냉장고에 빈 자리 만들기’, ‘컴퓨터 시간 줄이기, ‘텀블러 가지고 다니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기술된 내용을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나의 목마름 살피기’, ‘희생의 사람’, ‘무관심 버리기’ ‘비교하는 마음 버리기’, ‘조급함 버리기’, ‘무책임한 태도 버리기’, ‘어리석음 깨닫기’, ‘편견 벗어나기’ 등의 내용은 깊은 자기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차분하게 자기를 돌아볼 수 있어 좋았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절감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벼락치기 숙제를 하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있어 다행이다 싶습니다.

느긋하고 한갓진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현실은 늘 우리를 극한의 긴장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세상 풍경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군경에 의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와 폭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히스테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커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삶의 조건이 점점 악화될 때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타자들에 대한 배제와 폭력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러니 인종 범죄를 인정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선택할 용기를 발휘하자는 말입니다. 푸접없는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 주는 것보다 더 보람찬 일이 또 있을까요.

 

사진/김승범



지난 주중에 강릉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려는 길벗들의 모임에서 저를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조금 내서 안목항 근처 솔숲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카이트 서핑(kite surfing)을 하는 이들을 한참 지켜봤습니다. 보드 위에 올라 연이 이끄는 대로 파도 위를 스치듯 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이 역동적이었습니다. 활기찬 육체를 보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입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허난설헌 기념관이 있습니다. 매우 뛰어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대개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이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난설헌은 호이고 본명은 허초희(1563-1589)입니다. 이 땅에 겨우 27년 간 머물다 갔지만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남아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1577년에 김성립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과거시험 공부보다는 기생집에 출입하는 것을 더 즐기던 한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마 뭐라 말할 수도 없던 시대였던지라 그 애태움이 컸을 겁니다.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낳아 길렀는데, 그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 때문인지 그도 또한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운의 천재인 셈입니다.

기념관 바깥뜰에는 그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다리(가체)를 다하여 얹은머리를 높게 한 모양이었는데, 왠지 허난설헌의 쓸쓸했던 삶과 연결이 되지 않아 씁쓸했습니다. 그 동상 앞에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습니다. ‘아들 무덤 앞에서 우노라’(‘哭子’)라는 시입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비록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리라.
(<허난설헌 시선許蘭雪軒 詩選>, 허경진 엮음, 평민사,p.20)

마주보고 있는 아들과 딸의 무덤을 보는 엄마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나 후손을 앞세우는 것을 일러 참척(慘慽)이라 합니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경험이라는 뜻일 겁니다. 옛말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청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습니다. 사시나무에 부는 바람이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허난설헌은 스산할 뿐 아니라 속절없이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그 나무에 빗대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를 날리며 남매의 혼을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남매의 무덤 위에 술잔을 붓습니다. 여기서 술잔이라 번역된 한자는 ‘현주(玄酒)’인데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무술)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린 자식들의 무덤에 술을 올릴 수는 없지만 무술을 부어준 것입니다. 허난설헌은 앞서 떠난 남매가 저승에서도 의좋게 노는 광경을 그림으로 절망을 밀어내려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 깃든 속울음조차 몰아낼 수는 없어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이 시를 굳이 소개하는 까닭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 섰던 여인들의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분이 그렇게도 큰 고통을 겪으며 생과 사의 경계선을 건너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들의 아픔을 우리는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평범한 행복을 바라던 분이었을 겁니다.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고, 석양 무렵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새들이 즐겁게 재재대는 소리를 듣고 싶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평범한 행복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생태를 보여주는 영상을 볼 때마다 생명의 신비와 장엄함을 절감합니다. 동물들도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긴장한 채 살아갑니다. 악어에게 다리를 물린 누 한 마리가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온 몸의 힘을 다리에 모아 그는 밖으로 솟구쳐 오르려 하지만 악어는 완강한 이빨로 그는 물고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힘과 힘의 팽팽한 균형, 기진할 때마다 누는 잠시 쉬지만 다음 순간 또 다시 벗어날 길을 찾아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그 옆으로 새 한 마리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와 그 광경을 보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겅중겅중 그 곁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동물세계의 문법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런 광경에 감정을 이입하곤 합니다. 어쩌면 그게 인간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 고백합니다. 주님은 당신 눈앞에 펼쳐지는 인간세계의 참극을 무심하게 지나치실 수 없었습니다. 사투를 벌이는 악어와 누 곁을 유유히 지나쳤던 그 새처럼 사셨다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서러움, 고통과 모순, 더러움과 추함을 당신의 온 몸으로 받아들여 정화시키려 하셨기에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로 귀결된 삶과 무관하게 살면서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저버린 채 종교의식에만 골몰하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호통을 치십니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암 5:23). 십자가의 길을 온전하게 가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 지향만큼은 분명해야 합니다. 힘들다 하여 지향조차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었던 여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이나 가르침뿐이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라는 존재 그 자체를 그들은 차마 떠나보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던 분, 쓸쓸한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 주셨던 분과 헤어진다는 것은 마치 벼랑 끝으로의 추락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 간절한 사랑은 결코 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비밀을 조금은 압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부활절에도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어 유감입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우리는 한 몸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는 분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속에 들어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평강의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2021년 4월 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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