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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요란한 것과 조용한 것

by 한종호 2021. 2. 12.



“이따가 밥 잡수러 오세유!” 


아침 일찍 교회 마당을 쓸다가 일 나가던 이필로 속장님을 만났더니 오늘 당근 가는 일을 한다며 점심을 함께 먹자고 청합니다. 봄이 온 단강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는 농사일은 당근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단강의 특산물이기도 한 당근 씨를 강가 기름지고 너른 밭에 뿌림으로 한해 농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일을 마치고 강가 밭으로 나갔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이 가깝게 내다보이는 강가 밭,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발로 밟아 씨 뿌릴 골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 불과 이삼년 전 일인데, 이제는 트랙터가 골을 만들며 밭을 갈아 일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앞사람이 씨를 뿌리고 나가면 뒷사람이 손으로 흙을 덮어나가야 했는데, 이제는 빗자루로 그 일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흙을 살짝만 덮으면 되는 일이기에 오히려 빗자루가 더 잘 어울린다 싶었습니다. 


한해 두해 계속되는 농사일에 나름대로 요령이 생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요령은 빗자루질만이 아니어서 당근 씨에다 밀가루를 섞어 뿌리는 비법으로도 나타났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당근 씨, 어느 핸가 병억이네가 당근을 갈 때 씨를 뿌린 줄 알고 골을 덮었는데 나중에 보니 싹이 하나도 안 난 곳이 제법인 일이 있었습니다. 당근 씨에다 밀가루를 섞는 것은 씨를 어디까지 뿌렸는지를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한 일이지만 농사짓는 이들의 지혜를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밭 한쪽 끝 둑 아래에선 속장님의 며느리인 규성이 엄마가 점심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솥이며 그릇이며 반찬 등을 아예 밭으로 가지고 나와 따뜻한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화덕 두 개를 놓고 하나엔 밥을, 다른 하나엔 국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점심은 자갈밭 위에 차려졌습니다. 몇 가지 막 무친 봄나물과 함께 식탁은 풍성했습니다. 그냥 맨바닥에 앉아 먹는 점심이지만 함께 일하고 둘러앉아 먹는 식사의 단맛은 다른 어떤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수북하게 퍼주는 밥을 이내 두세 그릇씩 쉽게 쉽게 비워냅니다. 밥 먹으며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들, 웃음으로 나누는 이야기 속에 우리가 한 이웃임을 진하게 느낍니다. 


때때로 당근 값이 씨 값 품값도 안 될 때가 있지만, 그럴수록 씨를 뿌리는 농부들의 삶이 저리도록 귀했습니다. 세상 어떤 일보다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같이 흘리는 땀만큼, 같이 먹는 밥만큼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들어주는 것도 드물지 싶습니다. 


점심을 먹고 끝정자로 가기 위해 밭을 가로 지를 때였습니다. 예닐곱 대의 헬리콥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팀 스피리트 훈련이 한창입니다. 헬리콥터는 마치 이 땅을 지키는 것은 우리들입네 하는 식으로 요란을 떨며 지나갔지만, 난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한 마디를 했습니다. 


‘아니다. 이 땅을 지키는 것은 너희들 같이 요란한 것들이 아니다. 농부들의 씨 뿌리는 손, 이 땅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농부들의 저 고요한 손길이란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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