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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by 한종호 2021. 1. 15.

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 3:12-13) 

 

환자를 대동하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니 눈이 퐁퐁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눈이 시원의 세계로 저를 안내하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열린 흰 세계를 보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첫 문장만은 잊을 수 업습니다.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 삶의 무거움을 조금쯤 짐작하며 현실과는 아주 다른 세계를 꿈꾸었던 터라, 이 문장은 그야말로 주술처럼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흰 눈으로 덮인 세상은 분명히 사람을 낭만적으로 만듭니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나오는 한 두 구절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란 이름이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던 백석에게는 외롭고 쓸쓸한 자기 마음을 의탁하기에 적절한 이름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시구가 유난히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과 눈이 내리는 것을 인과 관계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요. 마치 황지우 시인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설렘 가운데 기다리는 이의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고 노래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파트 앞은 눈밭으로 변했고,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아이 둘이 엄마와 함께 나와 썰매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미리 마련해 놓았던 것일까요? 그런데 저만치에서 나무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경비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썰매를 타느라 빙판이 만들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겠지요. ‘에이, 잠깐이라도 눈 감아 주시지.’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내리는 눈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침묵’(Die Große Stille)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무려 168분짜리이니 짧다고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해발 1,300미터의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삶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이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한 봉쇄 수도원입니다. 대사도 별로 없고, 자연의 소리 이외의 인위적인 음악도 일체 배제하고, 자연 조명만으로 제작한 다큐입니다. 수도원의 삶이라는 게 단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노동하고 침묵하는 것이 다입니다. 침묵 속에서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다림질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참 거룩해 보입니다. 단순한 일상입니다. 한 가지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절뿐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들이 유일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산골에 눈이 내리자 하얀 수도복을 입은 수사들이 열을 지어 언덕을 올랐습니다. 울력이라도 하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언덕 아래로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습니다. 그 근엄하던 수사들의 입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놀이야말로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쉴러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들 속에는 너나없이 아이들이 숨어 있습니다. 역할과 지위와 나이라는 의상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잠시 깨어날 때 우리는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유머가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풀어준다면 웃음은 우울을 해독하는 명약입니다.

 

예수님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은 한결같이 그분의 거룩하신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맑고 고요한 관상의 깊이 속에 머물고 계신 주님을 그린 그림도 있고, 적대자들 앞에서도 한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그림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또한 비장합니다. 십자가 처형 장면을 형상화한 그림은 숭고한 아픔으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베다니 마을에 살던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평화를 알지 못하는 도성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주님은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눅 19:41). 이 말씀 앞에 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 5:7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은 주님을 거역하고 역사의 주권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며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시2:4)고 말합니다. 이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웃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1980년대 초반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던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던 예수님의 초상이 있습니다. 그 그림 속에서 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계십니다. 억압과 두려움이 먹장구름처럼 우리를 짓누를 때 주님의 그런 표정은 우리를 적잖이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자부하던 이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 있습니다. ‘마구 먹어대는 자’, ‘포도주를 마시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입니다. 이런 별명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적어도 사람들의 목을 조르듯 답답하게 만드는 분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흔쾌하게 초대에 응하고, 낯선 이들과의 잔치를 즐기셨던 주님은 분명히 젠체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드는 열쇠와도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요? 영혼이 맑은 사람, 깊은 곳에 잇대어 사는 사람은 강박적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힘들더라도 자꾸 유쾌하게 현실을 대하자고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행복’이라는 시는 역설적 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헤세는 그 바람이 절박할수록 행복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 목표나 목적을 정해놓고 맹렬히 돌진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붙잡으려고 쫓아다닌다면,

너는 아직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거야,

사랑스런 모든 것이 네 것이 된다 해도.

 

잃어버린 것을 네가 안타까워하고

목표를 정해 놓고 초조해한다면,

너는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모든 갈망을 단념하고

목표나 욕망 따위를 더 이상 알지 못할 때,

행복이라는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을 때,

 

비로소 일상의 물결은 더 이상 네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네 영혼은 안식을 찾으리라.”

-헤르만 헤세, ‘행복’, <인생의 노래> 중에서

 

대충대충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하며 조바심치거나 안달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고문하지 말고 묵묵히 일상을 충실히 살아낼 때 사람은 비로소 영혼의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원에 잇댄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나님의 값진 선물임을 자각하면서 한껏 기뻐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의무라는 단어가 조금 무겁지요? 그렇다면 영적 지혜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웃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이 많음을 잘 압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수록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시130:1-2) ‘깊은 물’ 속에 빠져들 듯 암담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해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잠시 쓰린 시간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희망의 날이 움터 올 것입니다. 희미한 빛, 미미한 희망이라 해도 꼭 붙드십시오. 그 작은 빛과 희망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스며드는 통로이니 말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명랑함을 감염시킬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1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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