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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숨어서 하는 사랑

by 한종호 2021. 1. 15.

한희철의 얘기마을(204)


숨어서 하는 사랑



밥을 안 먹어 걱정이던 규성이도 점심시간 제일 밥을 많이 먹는다. “엄마한테 갈 거야!” 한번 울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던 학래도 이른 아침부터 놀이방에 올 거라고 전화를 한다.


새침데기 선아도 친구들과 어울려 소꿉놀이에 정신이 없다. 할머니 젖을 물고 자 버릇 했던 제일 나이 어린 영현이는 아내 등이 낯선지 계속 잠을 못 잤고, 졸지에 엄마를 뺏긴 규민이만 칭얼대며 그 뒤를 쫓아다녔다.


희선이, 학내, 선아, 규민이, 재성이, 미애, 규성이, 영현이 등 모두 8명의 꼬마들이 아침부터 모여 자기들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작은 다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은 나름대로 질서를 세워가고 있다.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고, 인형을 갖고 놀기도 하고, 장난감 총을 들고 새 잡는 흉내를 내기도 한다.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노는 아이들 모습을 신기하고 귀엽게 바라보고, 종숙이 엄마는 애기 하나 더 낳아야겠다고 농만이 아닌 농을 한다.


간식 챙기랴, 쉬 시키랴, 밑 닦아주랴, 점심 차리랴, 아내 혼자 정신이 없다. 마땅한 봉사자가 없으니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일과 시간에 매여야 하는 불편과 힘겨움을 알면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로 하는 시작, 대견하고 미안하고 고맙다.


집안 청소와 점심 설거지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식판을 닦는 일은 군에서 해보고 얼마만인지.


문득 결혼을 앞두고 샀던 복사기 생각이 났다. 결혼예물을 하는 대신에 우린 복사기를 한대 샀다. 시골로 갈 목회라면 아예 진득하게 처박혀 있자는 뜻에서였다. 복사기는 동네 부고 몇 번 복사하곤 고장이 나 지금은 고철로 처박혀 있지만.


그렇다. 이렇게 시작하는 놀이방은 또 하나의 ‘숨어서 하는 사랑’이다. 그분을 향한 사랑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 숨어서 하는 사랑이 내내 기쁨의 샘으로 솟아나길!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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