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12)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고뿔은 다 나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환절기만 되면 찾아오는 불청객 때문에 늘 고생하곤 하셨지요. “가장 헐벗었다고 생각하는 겨울에, 나무들이 가장 뜨겁게 타오른다”는 말씀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무채색의 도시를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약속한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그렇게 일제히 피어나고 솟아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꾸만 교회 마당가의 살피꽃밭을 살피게 됩니다. 레오 리오니의 동화 《프레드릭》을 아시는지요? 교회에서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하던 초창기에 저는 틈만 나면 도서관에 들러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의 권고로 읽게 된 것이 바로 《프레드릭》이었습니다. 읽자마자 매혹되었습니다.

 

헛간과 곳간에서 가까운 돌담에 수다쟁이 들쥐 가족의 보금자리가 있었습니다. 농부들이 다 떠나고 난 후 헛간은 버려지고 곳간은 텅 비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작은 들쥐들은 옥수수와 나무 열매, 밀과 짚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프레드릭만 빼고는 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넌 왜 일하지 않느냐는 들쥐들의 질문에 프레드릭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어느 날 들쥐들은 동그마니 앉아 풀밭을 내려다보고 있는 프레드릭에게 지금은 뭐하냐고 물었습니다. 프레드릭은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라고 대답했습니다. 반쯤 눈을 감고 조는 것처럼 보이는 프레드릭에게 “너 꿈꾸고 있지?” 하고 묻자 프레드릭은 “아니야,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기나긴 겨울엔 얘깃거리가 동이 나잖아” 하고 대답했습니다.

 

겨울이 깊어가고 주위가 쓸쓸해지자 프레드릭은 들쥐들을 위해 햇살 얘기를 들려주었고 들쥐들은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프레드릭이 파란 덩굴꽃과, 노란 밀집 속의 붉은 양귀비꽃, 또 초록빛 딸기 덤불 얘기를 들려주자 들쥐들은 자기 마음 속에 그려진 색깔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프레드릭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자 들쥐들은 행복해져서 말합니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그러자 프레드릭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한 다음, 수줍게 말했습니다. “나도 알아.”(레오 리오니 그림/글, 《프레드릭》, 최순희 옮김, 시공주니어)

 

이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마지막 대목을 저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꿈을 꾸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드러낼 수 있을까요? 가끔은 ‘시인의 용도’가 뭐냐고 맹랑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저는 분명히 압니다. 시인은 우리 인생의 겨울을 위해 신이 보내주신 선물임을 말입니다. 지천으로 널려 있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것을 프레드릭은 모아둡니다. 그리고 쓸쓸한 날에 그것을 풀어내 다른 들쥐들의 쓸쓸한 마음에 봄을 가져옵니다.

 

정호승 시인이 예수를 가리켜 시인이라 했던 말은 이런 뜻에서 참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시인이게 하는 시인/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새벽의 사람/해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고요한 기다림의 아들”(<시인 예수> 중에서).

 

프레드릭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들쥐들의 마음에 봄의 기억을 되살려냈다면, 예수는 만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봄을 가져갔습니다. 예수를 가리켜 ‘안에 핀 꽃’이라 하는 이도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 100여 명의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개는 목회 초년병이거나 개척교회를 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대개 어떤 목마름에 이끌려 모임에 참여했을 겁니다. 어느 날 그들 내면에 활짝 피어난 ‘예수 꽃’에 이끌려 목회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현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길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을 겁니다. 조금 일찍 그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루하루 생존의 문제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그분들에게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심정으로 살라’, ‘패배를 받아들이라’, ‘크기에 대한 선망을 버리고 본질을 붙들라’는 말은 사치스러운 말처럼 들렸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그분들 속에 있는 ‘시인’을 무화시킬 수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3년 7개월 동안 자기 내외 둘이서 새벽 기도를 드린다고 말하던 목사 부인은 그간의 설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울컥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눈물을 거둔 후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어느 분은 장년 교인이 별로 없는 교회인지라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던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아이들과 컴퓨터 오락도 함께 해주고 씨름도 하면서 아이들과 놀아주었고, 사모님은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돌보아야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찬거리를 장만하는 일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일부러 시장을 보지 말고 냉장고 안에 있는 제일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자’고 다짐했습니다. 음식 만드는 일이 부담이 되면 짜증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식재료를 보내오는 이들도 생겼고 그 때문에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말하는 사모님의 표정이 참 선선했습니다.

 

어느 분은 큰 나무 아래에서는 큰 그늘이 생기고 작은 나무 아래에서는 작은 그늘이 생기는 법이니 자신의 분량에 맞게 성실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섬김을 위해 정위된 그분들의 삶은 비록 가난하기는 할망정 비참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인간의 등불을 밝혀든 채 살고 있으니 차라리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까요?

 

요즘 교회가 공사 소음으로 시끄럽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공간을 재배치하기 위한 공사인데 일의 과정이 그렇게 순조롭지 않습니다. 각자의 분야를 맡은 인부들의 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일이 꼬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커팅 작업을 하던 이가 실수로 동력선을 잘라놓아 전기가 끊겼는데, 전기공은 며칠 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식입니다. 덕분에 사흘씩이나 전기 없이 지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카페를 전전하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왜 협업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일까요? 현장에 붙어서서 잔소리를 하는 이들이 없기 때문일까요? 힘겨운 노동을 신명나게 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서로에 대해 배려하는 태도가 부족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소외된 노동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무겁습니다.

 

일상의 노동에 지친 이들에게 성찰적 태도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가요? 성찰이란 타자 혹은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돌아봄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무절제, 탐욕, 게으름, 분노를 돌아봄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의 가능성 앞에 세우는 것 말입니다. 몸 노동을 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쟁을 내면화한 채 살고 있는 이들이 자기 성찰적 태도를 갖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보다는 극복해야 할 대상인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경쟁’과 ‘피해의식’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순간 내면의 평화는 스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과 마음에 밴 습성을 ‘에토스(ethos)’라고 하지요? 에토스는 그대로 자기의 성격 혹은 인성으로 고착화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애써 자기를 성찰하고 단련하고 연마해야 합니다. 함부로, 되는 대로 사는 것처럼 인생의 낭비가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지어진 세상을 보면서 ‘참 좋다’ 하며 감탄하셨습니다. 세상의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지문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의 일도 그러하겠지요? 저는 가끔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못 하나를 박아도 기독교인답게 박아야 하고, 페인트 칠을 해도 기독교인답게 칠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에베소서 2:10)라는 성경구절이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이 말만 명심해도 삶의 자세가 저절로 가다듬어질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치는 윤리의 핵심은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라는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격의 고귀함과 선함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아름다움 앞에 자꾸 서보고, 그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깊어갈 때 자기 중심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객쩍은 말이 길어졌습니다. 일에 몰두하느라 봄볕으로 찾아오는 그분의 임재 앞에 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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